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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글] 희락의 하나님 나라

초록 등불 2012. 8. 3. 03:21

 

 [기쁨의 글] 희락의 하나님 나라

 

며칠 째 폭염이 기승입니다. 우리네 유머에 기억력이 부족한 사람을 ‘붕어기억’이라고 놀려대곤 하지만 우리네 기억도 붕어랑 그렇게 다를 바가 없는지, 매년의 여름과 매년의 겨울이 어째 가장 덥고 춥기만 한 것 같습니다.


몸이 다소 약한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그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을 저도 잘 견디는 편인데, 최근의 며칠 기온이 거의 체온에 육박하는 더위에는 저도 혀를 날름거리는 도사견처럼 축 늘어짐은 육신의 입은 연약함은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집 안에 에어컨이라도 있으면 문명의 이기의 도움으로 여름 날 속의 봄날이나 가을 속으로 갈 수 있으련만, 손이 네 개나 달린 선풍기가 아무리 빨리 부채를 돌려 보아도 찌는 더위를 날려주지는 못합니다.


바다나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계속이나 시내라도 근처에 있으면 가면 좋으려면, 그것도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궁리 끝에 집 안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습니다. 집안에 무슨 웅덩이냐고요? 그냥 자그마한 욕조에 물을 가득 담고 심하게 더울 때마다 들어가곤 나가곤 하면서 더위를 식히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디어를 낸 첫날 욕조에 가득 물어 채워놓고는 작은 어항에 들어간 큰 물고기처럼 어색하게 더위를 식히며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전에 보지 못한 아주 귀여운 남자 꼬마 아이의 모습으로 천사라고 생각되는 영적 존재가 하늘나라에도 무슨 과자 같은 먹거리가 있는지 막대 사탕 같은 것을 손에 들고 나타나 욕조 우편에 앉았습니다.


상황을 조금 설명 드려야 그 때의 제 기분을 알 수 있을 듯하여 설명을 부연하면, 작은 어항에 큰 물고기처럼 어색하게 들어가서 몸을 식히고 있는 제 우편 욕조 턱에 저를 마주하지 않고 등을 보인 채 앉더군요. 그러니까 꼬마 천사가 우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랑 얼굴이 딱 마주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고개를 우편으로 돌려서 저를 한번 보고는 그냥 우습다는 듯이 키득거리며 웃었습니다. 웃으며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조금 있다가 다시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서 저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며 또 웃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더니 가끔 아이들 엄마가 아이를 예뻐하면서 아주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우르르 꺄궁!”하면서 아이를 보고 아주 사랑스럽거나 우습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곤 하듯이, 갑자기 제 얼굴 가까이 꼬마 천사가 얼굴을 대고는 우습다는 표정으로 마구 웃어댔습니다.


처음 보는 너무도 예쁘고 귀여운 남자꼬마 아이의 모습이었는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저를 바라보면서 씨익 웃고는, 또 돌려서 씨익 웃고는 하다가 아주 일어서서 제 앞으로 얼굴을 들이대면서 우습다는 듯이 너무도 귀엽게 웃어대는 꼬마 천사의 모습에 욕조에 어색하게 누운 채로 저도 그만 큰 소리로 웃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존재들을 경험해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나무를 먹기 전에는 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처럼, 무슨 남녀간의 그러한 것들이나 옷매무새나 그런 것들로 웃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웃음은 선악과나무를 따먹기 이전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웃음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존재들을 다양하게 경험해보니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한결같이 기쁨과 희락의 환한 웃음으로 언제나 다가오며 제게 하늘의 기쁨을 전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는 말씀처럼 하늘에 속한 존재들에게서는 불의나 슬픔이나 염려와 근심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언제나 환하고 밝은 모습으로 나타나 제게 하늘의 기쁨을 전해주거나 보여주고는 가곤 합니다.


‘소피’라고 이름을 밝힌 제가 ‘다정이’라고 이름 지은 아주 예쁜 서양 여자아이의 모습을 닮은 천사는 나타나기면 하면, 마치 들녘에 들국화가 만발하게 피어있는 듯한 환하고 밝은 웃음으로 저를 기쁘게 해 줍니다. 어린 모습이지만 세상으로 말하면 가장 멋진 연인의 느낌이 강한데, 언제나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웃어가며 기쁨을 안겨줍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저는 늘 하늘의 위로 속에서 기쁘고 평안하고 행복한 줄로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저는 상당히 자주 마음의 힘겨움을 겪곤 합니다. 그것의 가장 근원은 육체적인 요소이지요.


몸이나 머리 등의 육체에 때로 심하게 때로 평범하게 통증이 몰려오면, 아무리 영적으로 충만하게 살려고 애를 쓰도 어쩔 수 없이 육신을 입은 몸, 때로는 아주 힘겨운 마음이 되곤 합니다. 그럴 때면 그냥 강가나 푸른 들녘으로 나아가서 때로는 찬송이나 찬양, 때로는 그냥 자연의 색깔을 닮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앉아 있곤 합니다.


그럴 때면 저를 위로라도 하려는 듯 꼬마 소년, 소녀 천사들이 나타나서 정확한 용어는 잘 모르겠지만 무슨 ‘캉캉’ 춤처럼 흥겹게 춤을 추며 저를 기쁘게 해 주려고 하는 모습들을 보기도 합니다. 마음이 조금 힘겨운 날들은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밝아지곤 하지만, 많이 힘겨운 날들은 그러한 것들로도 회복이 되지 않는 날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너무도 육체적 요인에 기인한 마음의 힘겨움, 도무지 회복이 되지 않아서 제가 ‘송이’라고 이름지은 ‘리지’천사를 영의 세계는 생각으로 교감하는 세계, 생각으로 꼬옥! 끌어안았습니다. 육과 영의 만남이지만 그 따듯한 마음을 표현하는 듯 영으로 포근하고 따듯한 ‘리지’의 볼의 감촉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습니다.


남들 눈에는 제가 그냥 혼자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저는 딸아이처럼 언제나 곁에서 기쁨과 해맑은 웃음을 전해주는‘송이’를 끌어안고 무척이나 힘겨운 마음으로 도로를 달리고 있었지요. 속울음이 조금 눈물로 볼을 타고 흘러내리더군요. 하지만 그러한 시간에 마음의 힘겨움을 견뎌낼 수 있는 하늘의 위로와 육신의 통증으로 말미암은 내면의 상처가 하늘 주님의 손길 아래서 눈이 녹듯 조금씩 녹아내려가곤 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전화상담을 해 보면 ‘목사님은 늘 천사가 와서 위로도 해 주고 힘들지 않겠어요’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주님의 사랑이 무척이나 위로가 되고 새로운 격려와 용기를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늘의 높은 뜻은 제가 다 알 수 없으나 육신의 아픔과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두시므로 아픈 육신을 입고서 언제나 홀로 주님 앞에서 지내다보면 마냥 기쁘고 언제나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몸이 아프고 힘들면 힘들고 때로는 삶의 이러저러한 힘겨움과 외로움 등으로 영적으로도 눌려 곤고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하늘의 위로, 곧 다양한 천사들을 보여주시며 위로하시는 것은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지고 가는 생의 무게보다 너무도 아픈 세월을 살아왔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도 가끔은 생각해봅니다.


어쨌거나 하늘의 존재들은 나타나면 언제나 하늘의 기쁨과 웃음과 평강을 전해주거나 주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강이요, 저와 여러분을 그 나라로 부르시는 것이지요.


기도나 찬양의 등의 경건 시간을 가지고 있다보면 찬양에 맞춘 춤사위, 워십으로 함께 경배하며 기쁨을 전해 주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찬양을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가 날아와서 얼굴을 마주하고 하얗게 웃어주다가 가곤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강이요, 저와 여러분을 그 나라로 부르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네 삶에는 너무도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의보다는 어둠에 속한 불의와 희락보다는 슬픔이, 평강보다는 염려와 근심의 문제가 매일 매시간 우리의 생의 길에 놓여 있으며 마주칩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마땅히 누려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의와 희락과 평강을 잃어버리고 힘겨워하고 슬퍼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곤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에서 늘 기쁨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회복하도록 매일의 삶에, 매 시간의 삶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듯 참된 행복이란 우리의 삶이나 환경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으며, 참된 기쁨도 세상에 속한 것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요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물론 앞선 저의 글에서 논한 것처럼 육신이 아프거나 마음이 힘겹거나 하는 세상적인 요소 등이 우리의 삶에서 많은 경우 기쁨과 웃음을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영의 깊은 샘의 생수를 마시면 이 세상의 것들이 우리에게서 궁극적인 기쁨과 웃음과 소망을 뺏어갈 수 없음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네 육신적 삶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가까이 하며 영의 깊은 세계를 거닐어야 합니다. 풍랑이 거세면 뿌리가 더욱 깊어야 이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사도바울을 통하여“항상 기뻐하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명하시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겠지만, 기쁨이 자연적으로 누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항상 기쁨을 잃지 않도록 영적으로 싸워 이기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런 기쁨을 잃지 않으려면 항상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다른 길은 없습니다. 참된 행복과 기쁨의 오직이시요, 유일이신 주님 안으로, 그분의 사랑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사랑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넉넉히 이길 영의 힘이 공급되어져 옵니다. 환경과 역경의 바위산을 넘어갈 수 있는 생명수의 강이 창일하게 흘러옵니다.


한 며칠 제가 몸이 힘겨워 마음도 조금 힘겨웠습니다. 날씨는 너무도 더워 그것만으로 지치는데 몸의 기운은 없고 머리는 건강한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한 묘한 두중감과 통증으로 저를 힘들게 하니 영적 사역은 마음, 마음도 곧 우리의 머리를 사용하여 느끼는 터, 머리가 맑지 못하니 영성생활이나 사역도 조금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당신의 능력으로 번개처럼 치유해 주시면 될 터, 왜 육신의 아픔을 감하여 주시지 않는지 하늘의 높은 경륜은 알 수 없지만, 그 힘겨움 속에서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제게 이르시는 말씀은 “그저 당신의 임재 안에서 조용히 있으라”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이르신 대로 분요한 세상의 떠나 주님 안에서, 주님의 임재 안에서 가만히 쉬고 또 쉬고 있노라보면 어느새 마음에 새로운 생기와 기쁨의 새싹이 돋아남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리면, 그것의 회복은 주님 안으로 그분의 임재 안으로 더욱 들어가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또 다시 목마르게 하는 것들일 뿐인 세상의 것들과 정욕과 쾌락의 늪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기쁨과 웃음 회복의 샘이 아니라 결국은 더 깊은 죽음과 사망의 늪일 뿐이지요.


기쁨과 생동은 참된 생명력의 외면적 나타남들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을 회복하려면 참된 생명력을 회복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생명력은 영혼육의 유기적인 건강에서 비롯되지만 가장 궁극적인 것은 영의 강건함, 영의 생명력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영의 강건함으로 말미암은 그러한 참된 기쁨과 생기를 회복하려면 불의에 속한 모든 것들에서 자신의 영과 마음을 지켜내며 의와 정결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며, 회개를 통하여 주님의 보혈로 죄를 씻어내야 합니다. 죄는 영적 사망의 독, 죄가 우리 속에 거하고서는 결코 영이 강건하여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주님의 보혈과 성령의 위로하심 가운데서 상처 가운데 받은 미움도 씻어내고, 더불어 내면적 상처 등도 말끔히 씻어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과 성령의 싸매시고 기름을 바르시는 사랑의 손길로 상처도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신앙생활, 곧 영적인 삶이란 바로 이러한 우리에게서 참된 생명력과 기쁨과 웃음을 뺏어가려는 어두움에 속한 것들과의 아름다운 싸움입니다. 앞에서 나누었듯이 우리에게 시련과 아픔의 골짜기가 깊을수록 더욱 주님의 사랑 안으로 깊이 들어가 그 싸움에서 우리는 넉넉히 이겨야 합니다.


경험해보면 세상에서 오는 육적, 심적인 슬픔과 아픔의 깊이도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정말 너무도 우리를 힘겹게 하고 지치게 하고 절망과 좌절시키려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게 경험한 바로는 그 어떤 것도 기도의 양이 넉넉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랑하려 함이 아니요, 도전을 주려 함인데 저는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았던 저의 극한의 어려움을 집요한 일 년의 철야기도를 통하여 이겨냈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기도가 충분하면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더불어 배운 것은 기도생활이라는 것이 결코 우리가 생각하듯 그런 얕은 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발목에도 찰랑거리지 않는 강가의 기도로는 결코 어떤 것도 극복하지 못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진정한 어떤 것도 얻어낼 수 없습니다. 힘에 겨운 기도가 늘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하며, 때로는 얍복 강가의 야곱의 기도가 우리 삶에 있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한편 영적 전쟁인데, 그리고 전쟁의 수단이 기도인데, 수월한 전쟁이 어디 있습니까? 결코 안일하고 나태한 마음과 기도 생활로는 진정한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지도 못하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합니다.

승리하지 못한다 함은 패배자로써 살아간다는 것인데 패배자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영적 승리자로서의 축복을 빼앗기고 패배자로서 착취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비록 힘겹더라도 우리는 충분하고도 깊은 기도의 생활로 영적 승리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깊은 기도로 주님의 깊은 품에 안기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기쁨과 웃음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진정 사랑하는 남녀도 숱한 슬픔도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기면 순간 다 잊어버리고 웃음을 찾게 되는데, 전능하신 주 사랑의 품에 오롯 안긴다면 어찌 웃음을 되찾지 못하겠습니까?


갖난 아이가 참된 웃음을 되찾는 것은 좋은 장난감도 아니요, 옷도 아니요, 오직 어미의 품에 안길 때 뿐입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참된 생명력과 그 가운데 기쁨과 웃음을 되찾는 것도 우리의 어미 되시는 주님의 품에 참되게 안기는 뿐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하늘의 기쁨을 주시려고 언제나 당신의 팔을 벌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지 마십시요. 오직 모든 것들의 참된 회복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 안에서 뿐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참된 생명력 가운데 하늘의 참 기쁨과 웃음을 언제나 잃지 마십시요. 기쁨은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내적, 외적 모습니다. 아멘! 샬롬!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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