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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진리] 영성의 체질화

초록 등불 2012. 10. 15. 17:36

 

   

 [핵심 진리] 영성의 체질화

 

주님께 혹독한 다루심을 받고 보니 그리스도인이 영성적 삶을 살아가려면 영성적 삶의 체질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성적 삶의 체질화는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혹독하고도 길고도 긴 시련의 시간과 그 속에서의 거룩한 몸부림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야곱의 일생을 보면 영성적 삶의 체질화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지요.


아버지와 형을 속인 대가로 혹독한 길고도 긴 타지에서의 방랑생활과 자신 역시도 외삼촌 라반과 자녀들에게도 속는 등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이 찾아오는 얍복강가에서의 처절한 몸부림을 통하여,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이라는 영성적 사람으로 변모되어 가지요.


이 영성적 삶의 체질화 곧 참된 경건으로서의 신앙의 성숙의 과정은 예수님께서 비유하신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도 살펴 볼 수 있는데, 씨앗을 그냥 죽게 만드는 길가의 모습에서 그 씨앗을 품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모습으로의 변모는 결코 쉽거나 짧지 않은 하나님의 다루심이 있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경우 30여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반드시 통과해야 하고 거쳐야만 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주님께 혹독한 다루심을 받고 보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성적 삶의 체질화의 계단의 첫 발거음의 계단에서부터 힘겹다고 느끼며, 조금 애써보다가 대부분 다시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삶으로 대부분 돌아가 버립니다.


형식이라는 등은 가졌으나 본질이라는 기름은 떨어진 슬기롭지 못한 다섯 처녀의 꺼진 등불의 삶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참된 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거나 하늘의 참된 신령한 빛과 안식과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적 진리는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찾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자신이 거쳐야만 하는 광야,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서 제하고 성령의 불로 태워버려야 하는 모습들과 말씀 안에서 오롯 세워져야 하는 단의 수축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부요와 육신의 건강과 삶의 편안함의 가나안의 열매만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는 결코 진정한 축복은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의 세상적 축복은 오히려 영을 멸망하게 하는 독이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손에 쥐어준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편안함을 원하나 하나님은 우리가 혼의 편안이 아닌 당신 안에서 영적으로 강건하게 되어 참된 안식, 곧 영의 평안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 풍성하고 복된 삶이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로 돌아가서 철저하게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랜 이스라엘의 기근이 배경인 갈멜산상의 엘리야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하늘에서 비만을 구하나,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삶과 신앙의 단이 수축되고 물이 하닌 불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불이 먼저 오지 않으면 결코 세상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비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축복과 영성적 체질을 위한 광야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과 인내를 지키지 못하고, 고달픈 대부분 광야에서 생을 마칩니다.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두 생을 마감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안타까운 생이지요.


우리가 광야라는 과정을 통과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섭리와 손길을 따르는 강한 믿음과 인내와 의지가 한편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로 지으시지 않고 온전한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광야에서 생을 마감하는 고달픈 생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누리는 풍성한 생인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신30: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신30: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30: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신30: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우리가 광야를 통하여 영성적 삶의 체질화를 살펴보면, 두 가지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지요. 하나는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의 영적 성숙을 위하여 걷게 하시는 시련의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비록 고되고 힘겨우나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믿고 따르는 우리의 순종과 인내와 의지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성적 체질을 위한 광야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과 인내를 지키지 못하고, 고달픈 대부분 광야에서 생을 마칩니다.


제가 주님께 다루심을 받고 보니 주님의 다루심은 사람의 다루심과는 다릅니다. 사람의 편에서 보면 때로 두려울 정도로 혹독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므로 육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혹독하게 다루지 않으시면 우리의 육성과 자아가 깨뜨려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육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마냥 힘들고 때로는 두렵기만 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민족의 혹독한 수난사가 대표적인 예이지요.


40년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마음대로 볼 수도 마실 수도 없는 삭막한 곳에서의 40여년의 시간을 한번 묵상해 보십시요. 군대생활과도 같은 40여년의 생활,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다루심은 사람의 다루심과는 달리 철저하고도 깊습니다. 육으로 보면 혹독하게만 보이지만, 영적 지각이 깨어나 영으로 보게 되면, 우리를 영적으로 철저하고도 아름답게 성장시키시려는 땅보다 높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과 신비조차 느껴지는 인도하심이지요.


그토록 혹독한 다루심을 받았기에 지금의 이스라엘은 지극히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움직이는 거인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대부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높은 경륜과 섭리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지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원망과 불평과 불신앙 속에서 광야에서 대부분 생을 마감하는 것 같습니다.


사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경륜과 손길은 혼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영의 지각이 깨어나고서야 보이는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광야라는 시간 속에서 좌절하고 낙망하지 않고 그 높은 사랑의 손길과 경륜을 영적 안목으로 볼 수 있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며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경건 생활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끝끝내 인내하며 믿음으로 승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 기도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긴긴 고난을 믿음으로 승리했던 요셉과 같은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처럼, 믿음과 인내로써 마침내 가나안의 풍성함을 맛보며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이웃과 천대의 자손이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기도 하며, 하늘의 신령한 복을 땅에서도 누리고, 하늘에서도 함께 누리는 참된 생명의 날이 임하는 것입니다.


눅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영성적 삶의 체질화는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각 사람의 인도하심에 따라 다르겠지만 혹독한 시련을 통과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죽음과도 같은 두려운 시간을 거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삶의 시련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향한 변하지 않는 불굴의 믿음과 인내와 의지로 승리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승리하는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가나안의 영광, 하늘빛의 영광은 열리는 것입니다.


무도를 배우는 사람이 견습생의 시절을 거쳐 진정한 고수가 되어서 무도와 그 정신이 자신의 삶 전체에 뿌리를 내리려면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지요. 혹독하고도 긴 수련과 수양의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지요.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세례를 처음 경험하면 성령 안에서 성화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이는 아직 연단되지 못한 처음 피어난 어린 나무의 꽃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직은 수많은 인내와 훈련의 겨울을 지내는 세월과 시간을 통하여 거목이 되고 흐드러진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삭막한 광야의 인도하심이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참고 인내하며 스스로도 부단히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다 보면, 어느 새 자신의 체질이 영성적 체질로 바뀌고 바뀌어져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보다 더 높은 빛의 세계를 거니는 모습을 보게 되며, 그 빛을 잃으면 이제는 체질화 되어 견디지 못하며 다시금 주님 앞에서 속회 회복하게 되는, 어느새 자신의 한 본질이 되어버린 영성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진정 주님이 내가 주는 물은 세상이 주는 물과 같지 아니하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는 말씀을 영으로 이해하게 되며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시며 그 말씀이 얼마나 참된 것인가를 알게 되며, 마침내 열어주시는 가나안의 풍성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나안의 풍성함은 결코 세상적인 축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많은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에서는 고난과 순교의 피와 땀을 흘리다 생을 마감하였지요.


하지만 그러한 영적인 체질화의 경건으로 나아가면 참된 가나안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의 행복이 결코 세상에 있지 않으며, 참된 부요함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헛될 뿐이요, 참된 소망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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