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고유자료/초록 영성의글

[영성의 글] 조용한 주말

초록 등불 2012. 11. 21. 16:38

 [영성의 글] 조용한 주말

 

정확한 셈은 어렵지만 대략 2~3여년 가량 그린 시냇가의 엘리야처럼, 아라비아의 바울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주님 앞에서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사람인지라 때로 세상의 품이 그립기도 하였겠지만, 영적 감각이 깨어나면 어둠 속 세상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닌 한편 힘겨운 것이라, 그냥 푸른 숲과 맑은 물을 벗 삼아 지냈을, 때로 적적하면 새들과 대화하고 꽃들과 풀들과 대화하며 지냈을 밧모섬의 요한처럼, 저도 그렇게 주님과 천사들과 영의 사랑을 나누며 홀로 조용히 잘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올해의 낙엽이 지고 쌀쌀해져 가는 늦가을의 즈음에 조금은 인간적인 외로움이 마음에 찾아오더군요.


경험해보니 육의 성장이나 영의 성장이나 비슷한 면이 많아서, 육의 자녀도 자라가고 성장해가면 부모의 배려나 대함이 다르듯, 영도 조금씩 자라가면 하나님의 다루심이 달라지더군요. 세세한 간섭하심은 줄어들고 점점 제게 많은 것들을 맡기시더군요.


그런 주님의 다루심도 조금씩 그리고 점점 조용해져 가고, 저도 조용해져 가기만 하는데, 깊어가는 가을 가슴 한 편에는 영이 아닌 세상의 외로움이 자리를 잡더군요. 잔잔하던 호수에 파랑이 일듯 마음에 그런 물결이 일렁거리더군요.


하지만 그 동안의 주님의 다루심에 비추어 볼 때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나 마음과 감정의 변화도, 설혹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아닌 근원이 제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삶의 재료와 소재들을 다 삶이나 주님의 뜻을 새롭게 깨닫거나,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영적인 보화들로 모두 바꾸어 주셨기에,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안에서 그런 마음의 흐름도 잔잔히 느껴보았습니다.


그런 날이나 시간이면 전화기를 꺼내들고 혹여 주 안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진정한 동역자나 영의 벗이 있나 하나 둘 헤아려 보기도 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고 통화버튼이 눌러지지가 않습니다.


제가 경험해보고 영적인 자료들을 살펴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계열의 은사라도 우리의 타고난 기질과 성품을 많이 활용하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감성이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거나 등의 빛 계열의 은사가 잘 열리고 발달이 잘 됩니다. 하지만 감성이 다소 둔하지만 담력이 있는 사람들은 능력 행함과 같은 담력이 필요한 불 계열의 은사와 능력의 세계가 잘 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가끔은 제가 조금 힘겹다고 느낄 정도로 감성이나 미적 감각이 섬세하고 미려합니다. 그런 천성적인 감성의 섬세함 위에 영적 감각이 깨어나니 감성적으로 힘겨운 것, 영적으로 힘겨운 것들이 더불어, 삶에서 힘겨움을 느끼는 요소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그런 감성적, 영적 섬세함 속에서 통화할 벗을 찾으니, 벗이 되려면 연령도 비슷해야 하고, 감성과 기질도 비슷해야 하고, 성별도 고려, 또 영적 수준이나 많은 면에서도 너무 차이가 나면 안 되니, 이가 맞으면 저가 맞지 않고 저가 맞으면 이가 맞지 않아서 그냥 전화기를 내려놓곤 하였습니다.


단순한 성령의 불세례 등을 경험하였을 때는 잘 몰랐는데, 주님이 영의 세계를 열어 주시고 경험하게 하시고, 영적 감각이 깨어나게 하시니, 하늘에 속한 영들이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나 모든 것들에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지만 영의 에너지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자신보다 낮은 에너지의 것들과 접촉을 하게 되면 힘겨움을 느끼게 되고, 높은 영역의 존재들과 접촉을 하게 되면 영이 고양되고 함양이 되곤 하더군요. 하지만 세상에 속한 대부분의 것들은 어둠에 속해 있기 때문에 힘겨운 영역들이 훨씬 많지요.


그래서 사역을 위해서는 사람들과 상담도 하고 만남도 갖고 하지만, 여타의 일반적인 세상 속의 활동은 조금씩 절제하게 되더군요. 대부분 힘겹게 다가오기 때문이지요. 어쨌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주님 안에서 그냥 홀로 조용히 지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과거에 선지자나 예언자로 빛의 높은 영역, 영계의 높은 영역을 거니셨던 신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듯 한편 능력만 누린 것이 아니라 힘겨운 부분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알게 되더군요. 평범한 사람들처럼 일상적인 삶을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해 보게 되더군요.


그렇게 통화할 벗을 때로 찾아보곤 하다가 다시 내려놓곤, 홀로 가만 생각해보니 지금 제 마음 속에 느껴지는 외로움은 누군가 좋은 영적인 벗과도 같은 어떤 사람을 찾거나 혹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채워질 수 있는 그런 외로움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가진 본질적인 어떤 외로움이더군요. 세상이나 사람으로부터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인간 존재 본질의 외로움이더군요.


외로움을 채워줄 그 무엇을 찾고는 있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세상에 속한 것이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외로움이 아닌 인간 존재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외로움이더군요.


그러면 그냥 다시 저만의 홀로의 마음의 숲으로 돌아와 주님의 사랑으로 제 곁에 있는 천사들과 조용히 영으로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조금 달래곤 하였지요.


하지만 그런 천사들과의 대화도 행복하고 많은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상계에 속한 실제적 존재들과의 만남이나 대화보다는 사실감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혼의 영역이 느끼는 외로움의 여운은 남습니다. 그러면 다소의 외로움 가운데서 그냥 주님 안에 조용히 있다가 잠이 들곤 하였지요.


앞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어떤 이유로 그런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이 올 가을에는 가슴 한 편에 일렁거리는지 알 수 없지만, 목회자는 그런 인간의 근원적 고독감도 영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바, 그냥 주님 안에서 마음의 흐름을 잔잔히 느껴보았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론적인 고독감도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더군요.


그래서 한편 시인이다 보니 그 근원적 인간의 고독감을 사랑의 시가로 그려보기도 하였지요.


표현은 인간의 사랑인 듯 노래하지만 가슴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지개와 같은 궁극의 사랑을 향한 목마름의 노래이지요. 때로는 존재의 궁극이신 창조주를 향한 목마름의 노래이지요.


그런 마음의 파랑 속에서 주말이 다가왔더군요.


날씨는 쌀쌀해져 가고 겨울의 차가운 삭풍이 불어오면 나들이도 쉽지 않을 터, 오후에 길벗이 자전거를 벗 삼아 늘 가는 제가 ‘쿨만의 언덕’이라고 이름 지은 강변가로 달려갔습니다.


최근 다소 머리도 맑지 않고 아파서 환하게 곁을 따르는 천사들에게 그저 조용한 미소의 마음만 보내고, 조금은 조용히 강변을 찾아갔습니다. 그렇지 않은 날에는 함께 노래를 하면서 가곤 하는데요.


언제나 부족한 운동, 운동 기구에 올라 몸을 좀 풀고는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의 언덕, ‘쿨만의 언덕’에 조용히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강물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우며 뭔지 생명의 흐름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은 또 가을 그 나름의 색채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조용히 저의 아름다운 천사 ‘린’과 조용히 대화도 나누어 보고 비둘기 형상의 성령님과도 마음도 나누어 보곤 하다가, ‘쿨만의 언덕’에 왔으니 캐더린 쿨만 여사 모습의 돕는 영으로 제 곁에 있는 영을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영의 세계는 마음의 세계, 한번 본 천사들이나 영들은 마음으로 부르면 대부분 언제고 옵니다.


생전의 캐더린 쿨만 여사 모습의 영이 희고 깨끗한 모습으로 제 곁에 보이더군요. 천사들이나 하늘의 영들은 대부분 더 이상 하얗게 될 수 없어 보이는 순결한 세마포 빛이거나 혹은 하얀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사람의 영은 죽으면 하나님의 뜻과 심판 안에서 자신의 영의 세계로 돌아가기에 생전의 쿨만 여사의 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한 시절 부족한 삶을 살기도 하셨지만, 나머지 생의 시간을 너무도 아름답게 주님께 헌신하셨던 그 삶을 조금이라도 본 받으라고 어느 날 문득 저는 별스레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지만 그분의 모습으로 돕는 영을 제 곁에 두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그분의 생전의 모습으로 보이니 마치 꼭 그분을 뵙는 것만 같습니다. 자애로운 누나 같기도 하고, 영성 생활의 어머니처럼 나타나면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그날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날을 다른 날과 같이 서로 마주보며 별스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냥 서로 조용히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모습 속에서 그냥 주 안에서는 너무도 행복하였을 것이고 영광스러웠을 것이며, 인간적으로나 혼적으로 한편 너무도 고독했을 그분의 삶의 조용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영은 또한 말없이 말이 필요 없는 저를 바라보며 가슴으로 교감과 진리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교감은 그분도 생전에 한편 한없이 고독하였을 고독감의 교감이었습니다. 그분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고백을 볼 수 있지요.


“나는 집회 때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언제나 홀로였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눈빛으로 전해준 진리의 조각은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어쩔 수 없이 때로 고독하며, 때로 눈물지으며, 울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이지만,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며, 가장 지혜로운 삶이라는 말없는 가슴의 교감이었습니다.


가을이 저물어 감이 아쉬운 주말이었지만, 아름다운 가을의 붉은 단풍잎 같은 진리의 작은 잎새 하나를 쿨만 여사 모습의 영과의 말없는 교감 속에서 작은 가슴에 담아본 조용한 주말이었습니다. 샬롬!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샬롬] 내용 중 상당한 부분을 인용하시거나 원본을 그대로 게제하실 경우는, 출판을 염두에 둔 글과 말씀들이니 출처 부분을 남기셔서 저작권을 지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카페규칙 상 스크렙 및 링크가 허락되지 아니한 게시판에 부지 중 올렸다면 먼저 죄송한 맘 전합니다. 소식 주시면 글올림을 삼가거나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카페운영에 어려움 주지 않기 위하여 저작권 유의 배경음악과 그림자료 살펴 조심하고 있습니다 / 감사 드립니다. 늘 평안하십시요. 샬롬..

 

 Home  cafe

 

 

배경음악(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