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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글] 찬양의 날개 아래

초록 등불 2013. 1. 2. 05:58

 [영성의 글] 찬양의 날개 아래

 

하늘에 고요히 울려 퍼지는 감동 어린 찬양의 날개와 함께 아름다운 저의 천사 ‘린’의 아름다운 날개도 펴졌습니다.


세상 그 어떤 일이 쉬운 일이 있겠으며 모든 일들에는 나름의 어려움이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목회자로 한 세월 살아보니 이 생의 길 또한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듯이 사람들을 상대해보면 사람은 참으로 놀랍고도 위대한 존재인 것 같으면서도 또한 너무도 작은 존재인 것을 경험하게 되지요.


놀랍고도 위대한 존재라는 것은 피조물 중에서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 받아 가장 놀라운 지성과 재주를 지녀 놀라운 과학과 인문의 문명의 세계를 열어감 등이요, 작은 존재라는 것은 다 자신의 작은 자아 안에서 얼마나 우리들의 마음과 감정이 이기적이요, 변화가 심한 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람을 주로 상대하는 목회자로서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경험해보면, 대부분의 우리네 사람의 마음 그릇이 얼마나 작은 지를 보게 되지요. 조금 서운한 말 하나, 조금 무심한 눈빛 하나, 조금 서운한 행동 하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등을 돌려버립니다. 미워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사이를 살아가면서 세상의 일반적인 직장생활을 할 때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이치를 따져서 ‘내가 옳고 네가 그르면’ 네가 내게 왜 그러느냐고 나름 말을 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목회자로 살아가게 되면 ‘내가 옳고 네가 틀려도’ 말없이 그 모든 것을 나의 잘못과 사랑부족으로 안아주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그러시냐?”라고 말하면 답할 말을 잊게 됩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그를 따르는 우리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까요. 실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렇게 해야 하지만, 목회자는 직임 상 외식으로라도 그렇게 더욱 할 수 밖에 없지요.


눅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은 가까이는 12명의 제자를 두셨고, 그리고 수많은 무리 가운데 계셨으며 언제 어디서나 홀로 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무리 가운데 계셨지만, 실상 예수님은 항상 혼자였습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계셨지만 정작 그분께는 머리 둘만한 곳도 없었습니다.


마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그리고 사람의 속성을 아셨기에 사람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으시고 그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요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2: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장 가까운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길에서도 누가 큰지를 두고 다투며 천국에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자신들을 앉게 해 달라고 싸우지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그리고 그런 가까운 제자였던 사람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여 은 삼십 냥의 헐값에 팔려가게 되지요.


그리고 자신이나 가족의 병을 치유받고 귀신을 내어 쫓기 위해서는 ‘주님’, ‘선생님’이라고 달려들던 수많은 무리들, 그들에게 세상의 영광을 가져다줄 세상의 임금으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의 입성길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던 수많은 군중들이, 종교 지도자들의 재판에 의하여 초라해진 주님 앞에서는 변하여 “바라바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게 되지요.


이 땅에 계시던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 속에 있었으나 실상 늘 혼자였습니다. 예수님의 그 영광을 함께 하려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으나 그 아픔과 고난과 십자가를 진정 함께 하려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으셨지요.


성경을 살펴보면 늘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에는 사람들의 오해와 외면과 배신의 고독한 상처와 눈물이 어려 있습니다.


마지막 생의 여정인 십자가에서 주님에게 벗은 함께 죽어가면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을 애소하는 가여운 영혼 하나였지요. 성경에 모든 것이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좌우의 강도도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구원과 멸망을 상징하는 의미이겠지만, 한편 마지막 힘겨운 길에 성부 하나님이 주신 작은 벗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목회를 해보면 주님이 지신 무게에야 티끌만큼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세상의 사람들의 속성은 여전하니 수많은 무리 가운데 있을지라도 목회자는 혼자인 것을 늘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에게와 마찬가지로 영광을 함께 나누고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많아도 고난과 십자가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지는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 저 역시 그러한 존재일 뿐이니까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목회자의 삶의 힘겨움입니다. 한 시절 세상의 직업도 가져보았지만 나름 교사라는 좋은 직장이라 그랬는지 몰랐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목회자인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요,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걸어가야 할 길이니까요.


하지만 사람이기에 애써 몇 시간이고 상담을 해 드려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 조금은 서운합니다. 시시로 마음의 상처가 되는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 때로는 혼자 고독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소리 없이 주님 앞에서 울게 됩니다.


세상 일이 그 어느 것이 힘들지 않겠느냐마는 목회자의 삶도 제겐 참으로 쉽지 만은 않게 다가옵니다.


본시 그릇도 부족한데, 그리고 육체의 연약함 등 저의 삶의 무게도 적지 않은데, 또 한편 주님께서 영성의 능력 사역으로 인도하셔서 평범한 목회가 아닌 그 일을 해보니 이건 또 다른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의사가 매양 환자를 상대하듯이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영적으로 너무도 다양한 어려움의 분들만 상대하게 됩니다.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질병, 어두움의 영에 포로 된 힘겨움, 삶의 지독한 상처, 인간관계로 인한 힘겨운 문제 등등 수많은 어려움의 분들을 상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의사에게는 온통 세상에 환자만 가득한 득 보일 수 있듯이 제게는 세상이 온통 영적으로 치유 받아야 할 사람들만 가득해 보입니다. 정말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온통 영적으로 심각하게 병들어 있습니다.


매일은 아니지만 밤이나 낮이나 그런 다양한 문제들로 저를 찾습니다. 잠자리에서 곤한 눈을 뜨면 어떤 날은 상담 요청이 쌓여있습니다. 그러면 저의 지병으로 시큰한 저의 몸을 안고 정신을 추스르고 힘겨운 마음을 추스르고 그 요청에 또 응해 드립니다.


어쩌다 제가 피곤해서 조금 성의 없게 상담을 하면 또 서운해 하실 것 같아 다독거림의 전화를 드릴 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어느 날 일은 많고 피곤해서 조금만 성의 없이 답변을 하면 토라져서 곁을 떠나가 버립니다. 자신은 혼자지만 저는 수없는 분들을 상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시나 봅니다.


저도 사람이기에 간간의 피곤하여 그러는 다소 성의 없이 보이는 상담이나 답변은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마음은 아닌데 몸이 피곤한 때도 그럴 수 있고, 저도 사람이기에 답변은 해 드려야겠는데 저의 마음이 힘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실상 경험해보면 문자 한번 성의 없이 답장하면 서운해 하시고 곁을 떠나버리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런 부분은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한다는 것을 알고 배려하고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또 때로는 어둠의 영에 시달리시는 분들의 경우는 그 어두움의 영을 전이시켜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 시간은 눈만 뜨면 그 어두움의 영으로 인한 힘겨움과 중보자로서 싸움을 해야 합니다. 경험해보니 사역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주님의 남은 중보의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힘겨움이지만 또 한편 보람입니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 보여드릴 작은 열매들이니까요. 그리고 사역을 해보면 힘겨운 만큼 주님이 또한 기쁨을 때때로 주십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은 힘겹지만 마냥 힘겨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가장 상처가 되고 힘겨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싸움에서 져서 싸움을 포기하고 곁을 떠나가실 때 가장 마음이 서운하고 아픕니다.


그것은 그렇게 시간을 들여 상담을 해 드리고, 저는 머리가 아닌 삶으로 말씀의 다루심을 받았기에,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절절히 제가 아는 나름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도, 지금 그러시면 그 다음은 이러고 이럴 것이 제 눈엔 보여서 애소하듯 말씀 드려도, 결국은 영적 싸움에서 져서 어둠으로 말없이 사라질 때가 가장 많이 힘이 듭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분들이 다 그 싸움에서 지십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영적 전쟁의 실상이 얼마나 힘겨운 것들이며, 우리의 믿음과 인내가 또한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 옛날 요셉과 다윗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인내하며 견디어 냈습니까? 다윗은 15년의 사울왕의 추적을 피해 다녀야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결코 믿음과 인내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역을 해보면 우리들은 대부분 며칠, 몇 주도 견디지 못합니다. 대부분 작심삼일이나 작심 두어 달로 다 주저앉습니다.


경험해보니 신앙생활은 그런 마음으로는 결코 영적으로 승리하지 못합니다. 요셉과 다윗과 같은 결연한 믿음과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결단코 하나님을 믿으며 인내하리라는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실패합니다.


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힘을 다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결연한 의지 없이는 다 믿음의 삶에서 실패합니다. 시쳇말로 죽기 살기로 신앙생활하지 아니하면 다 집니다.


그렇게 영적인 싸움에서 져서 사람들이 어두움으로 하나 둘 떠나갈 때, 안타까움을 동반한 헤어짐의 서운함과 마음의 상처랄까 그런 것을 많이 받게 됩니다. 저도 약한 사람일 뿐이니 넉넉히 이해는 되지만 마음의 안타까움과 서운함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신학적인 견해나 신앙의 색깔이 달라서 떠나갈 때도 있겠지요. 그런 경우라면 상처라고 하긴 어렵지만, 어쨌거나 사역을 해보면 사람들의 떠나감이란 마음의 서운함을 안겨다 줍니다.


더욱이 실제적 관계를 맺고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사역이 아닌 간접 영성 사역을 하다보면 더욱 더 많은 사람들과의 이런저런 이유로 만남과 또 이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시 여린 감정을 지닌 사람이라 그런 일들에 시시로 서운함과 상처를 받곤 합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네 사람들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 앞이나 하나님 앞이나 인정을 받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변함이 적은 성실함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그리고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우리는 변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변함이 적은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인 진실한 청지기를 일꾼으로 찾으시고 우리 사회도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변화가 많은 사람은 가치 없는 사람입니다.


눅12: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눅12: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그리고 다른 마음에 힘겨움을 안겨 주는 것들은 사람들이 만나고 당하는 어려움들의 소식입니다.


간접사역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좋은 소식으로 저를 찾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한계적인 상황의 다양한 어려움으로 저를 찾습니다. 그런 새 소식을 접하게 될 때마다 저 또한 마음이 함께 힘겨워지지요. 체력이 딸려 많이 중보하지는 못하지만, 급한 상황에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때로는 누워서라도 중보를 하곤 하지요.


최근에 다소 그러한 일들이 일련으로 연속으로 일어났습니다. 아주 안타깝고 한계적인 상황의 힘겨운 일을 만난 분들의 소식, 아울러 이런 저런 이유로 어둠 속으로 떠나시고 소식이 단절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서운도 하고 힘겹더군요.


마음이 힘겨운 날은 영의 에너지를 상실해 영적으로 침체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저는 이러한 상태가 되면 사역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 영적 에너지의 상태에서 영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이러한 날은 글을 쓰거나 하면 그 낮은 에너지의 수준에서 밖에 말씀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사역보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 관리가 우선인 것이지요.


이런 날은 조용히 주 안에서 쉬거나 아니면 그냥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처럼 저만의 쉼터 그늘에 앉아서 고요히 쉽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곳이 없는 목회자의 삶, 가끔 이런 날은 혼자 주 안에서 조용히 울어도 감정의 정화가 되곤 하더군요.


주 안에서 우는 것은 이렇게 든 저렇게 든 유익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눈물이 말라버린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감동과 눈물이 사라진 사랑이 죽은 사랑이 듯이요.


하루 이렇게 힘든 날, 아니 깊은 밤, 혼자 맘이 다소 곤하여 쉬다가 적적하여 유튜브로 찬양이나 연주 찬양을 검색하여 들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찬양을 한 곡 두 곡 듣노라니, 조금씩 마음이 찬양의 날개의 그늘 아래서 쉼을 얻어 갔습니다.


그러다 어떤 찬양 한 곡을 듣는데 제 자신의 삶과 사역의 힘겨움 가운데 더 선연히 보이는 십자가 길을 고독한 눈물과 상처로 걸어가신 예수님의 아픔이 다가와 왈칵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제가 아닌 주님이 아파서 울었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첫째는 저 자신을 보면 그러하고 둘째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바라보면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외롭고 서운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찾고 구하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이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떡을 먹고 배불러 그 떡을 먹기 위해서 우르르 다니던 예수님 시절의 무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십자가를 함께 지려던 마음은 추호도 없고 영광의 보좌 좌우편에 서로 앉겠다고 싸우던 제자들과 다를 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진실들이 조금씩 떠져가는 저의 영의 눈에 첫째는 제 속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하나씩 보여질 때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주님의 진한 외로움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주님을 외롭게 서운하게 합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찾노라 말만 할 뿐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가득 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찬양을 듣고 또 듣다가 어떤 찬양 한 곡을 듣는데 제 자신의 삶과 사역의 힘겨움 가운데 더 선연히 보이는 십자가 길을 고독한 눈물과 상처로 걸어가신 예수님의 아픔이 다가와 왈칵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외로우신 주님이 제 아픔 안에서 더욱 아파서 한동안 울었습니다.


그렇게 찬양 가운데 마음이 쉼을 얻고 주 안에서 울기도 하며 쉼과 회복을 누리고 있는 그 시간 제 곁에 있는 아름다운 여왕과도 같은 모습의 천사 ‘린’이 제가 본 모습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 대하듯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저의 몸을 감싸고 찬양을 따라 날고 돌면서 하늘 수정과도 같고 호수와도 같은 사랑 빛 눈동자로 조용히 바라보았습니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습니다. 말없이도 무엇을 전해주는지 보이니까요. 그것은 한없는 주님의 사랑이요, 위로요, 영의 어미 되신 주님의 보듬어 주심이었습니다. 저의 몸을 감싸고 날고 돌며 한없이 저를 얼러 주었습니다. (얼러준다는 말은 마음을 달래준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몸도 약한 편이고 의지도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감정도 여리고 상처도 잘 받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그릇도 부족하고 목회자의 삶이 사실 제게 무겁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위로 속에서 늘 그렇게 다시금 쉼을 얻고 일어서곤 합니다.


저 같이 연약한 사람도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는 나름 이겨갈 수 있더군요. 그러니 여러분도 능히 모든 어려움 이겨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할수록 주님의 붙드심이 크니까요.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제가 발견한 진실 하나는 결코 세상에서는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궁극의 위로는 주님께로서 옵니다.


그래서 저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주님 앞에 있습니다. 주 안에 있습니다. 울어도 주 안에서 울고, 쉬어도 주 안에서 쉬며, 곤하여 잠을 자도 주 안에서 잡니다. 그렇게 주 안에 있으면 다시금 일어서는 저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주 안에 있으면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반드시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위로를 찾으려 결코 세상으로 나가지 마십시요. 그곳은 더욱 곤고함과 사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다소 힘겨웠고 또한 힘겨운 가운데 주 안에서 쉬다가 ‘린’천사를 통한 주님의 위로 안에서 새삼 느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찬양의 힘이었습니다.


제 힘든 마음을 달래 주고 마음의 문을 하늘로 향하여 열어준 것은 다름 아닌 찬양이었습니다.

그 찬양의 날개 아래서 쉬다가 찬양의 날개처럼 아름다운 날개를 펴고 저를 위로하는 ‘린’ 천사의 모습 가운데 계신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 눈동자에 어린 위로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 찬양의 날개 아래, 찬양과 함께 펼쳐진 여호와의 날개 아래서 제 마음을 쉼을 얻고 새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시시로 지치고 곤하거든 찬양의 날개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 보십시요. 힘겨운 일, 힘겨운 맘 다 내려놓고 조용히 주님을 찬양하는 찬양의 날개 그늘 아래로 들어가 보십시요. 곧 여러분의 마음에 쉼과 회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찬양하는 찬양의 삶을 살아가십시요. 그리할 때 영광 중에 임하시는 주님을 시시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기뻐하시며 우리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시150: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150: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시150: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시150:4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시150: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시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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