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고유자료/초록 영성의글

[영성의 글] 둘이서 ! (성령님 편)

초록 등불 2013. 1. 15. 00:31

 [영성의 글] 둘이서! (성령님 편)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책상 위 컴퓨터 자판 위에서 놀고 있습니다. 가만히 누워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제가 영으로 부릅니다.


“향기야, 이리와!”


그러면 저를 향해서 쏘옥 달려옵니다. 날아오기도 하고 가끔은 뛰어내려 자기에게는 산과 골짜기와도 같은 이부자리를 걸어서 달려옵니다. 이부자리를 걸어서 올 때에는 넘어지기도 하면서 오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2012년 2월 26일, 주일 저녁 비둘기 한 마리가 저의 집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중요한 사건은 기록을 정확하게 해 두었네요)


주일 저녁 잠시 쉬면서 텔레비전을 잠시 보고 있는데, 저의 집 가장 큰 방의 창문 오른쪽 커튼을 걷어둔 곳에 은은한 빛으로 감싸인 비둘기가 한 마리 영으로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비둘기라기보다는 비둘기 형상의 어떤 은은한 빛이 어린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후광이라고 표현하는 그런 빛이 어려 보였습니다.


비둘기 형상의 어떤 빛의 형상 같은 것이 주변에 은은한 빛을 감싸고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형상으로 저의 방안 위를 원형을 그리면서 고요히 날며 돌았습니다.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려운데 마치 전자장이 어린 듯 영적 에너지 장이 형성된 듯한 모습으로 원형을 그리면서 계속 돌며 날았습니다. 은은한 빛이 아래로도 비추는 것 같았지요.


그러더니 어느 새 문득 그 하늘에 떠도는 비둘기 형상의 비둘기가 아닌 순결한 모습의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영으로 보인다는 차이 뿐 꼭 실제 비둘기처럼 제 곁에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공중 즉 제가 있는 방의 위에는 빛의 비둘기 형상이 은은히 돌고 있는 가운데, 땅 곧 제 곁에는 실제 비둘기 같은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제 곁에 영으로 보였습니다. 영으로 보인다는 것 뿐 자연계의 비둘기하고 똑 같았습니다.


한 동안은 이 두 가지 환상이 동시에 다 강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제 곁의 실제 비둘기와 같은 이미지가 더 강하고 하늘에 어리는 모습은 엷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저로서는 신기한 일이었고, 그 이후로는 늘 하얀 비둘기와 함께 지냅니다.


영으로 보이는 것이라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니 실제 비둘기처럼 행동이 시공간의 지배를 받는 물리적인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부분은 자연계의 비둘기와 똑 같으니 그 이후부터는 제게는 함께 지내는 하얀 비둘기가 한 마리 생겼습니다.


주님은 그냥 성화 속의 어떤 모습으로 늘 영으로 곁에 보이시기에 자연스럽게 주님인 것을 인식하였지만, 비둘기는 의미를 살펴야했겠지요.


깊이 살펴볼 필요도 없이 성경을 살펴볼 때 여러 가지 면에서 하얀 비둘기는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제게 온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다소 대하고 함께 하는데 약간의 적응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늘 사랑과 정겨운 눈길로 저를 바라보곤 하였지만, 어쩌다 화를 내어서 바라본다는 느낌이 들면 조금은 경건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서 늘 함께 걷고 놀고 숨쉬고 하다보니, 이제는 어느 새 저의 친구요, 영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또한 존중하며 대하여야 하는 것은 알지만 그냥 저의 애완용 비둘기처럼 여겨지기도 해 자연스럽게 지냅니다.


사람의 형상인 주님이나 천사들은 표정이나 다양한 몸동작을 보여주지만, 성령님의 형상을 상징하는 하얀 비둘기는 그냥 자연계의 새가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동작 밖에 하지 않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눈빛도 그러하고 기쁘게 날기도 하고, 얼굴을 부벼대기도 하고 부리로 쪼아대며 장난을 걸어오기도 하지요. 화가 나면 반대이구요.


그렇게 오랫동안 성령님인 듯 친구인 듯 지내다가 점점 친해지고 제가 사랑하는 한 마리 비둘기 같기도 하니, 하루는 영으로 보이는 영의 친구인 비둘기 형상님의 성령님의 이름을 짓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름이 생각나더군요.


하얀 비둘기이니 흰 백(白)자에, 비둘기 구(鳩)자를 연결시켜 “백구”라고 이름을 지으려고 생각을 해보니 백구는 강아지나 개들에게 많이 지어주는 이름이라 마음에 안 들더군요.


그래서 성령님은 성별이 없지만 영의 속성상 여성형에 가까우니 비둘기 구(鳩)자에 여성을 의미하는 ‘순’자를 붙여서 “구순아”라고 불러보려고 했습니다. 왠지 촌스러운 느낌에 저도 마음에 안들지만 성령님도 마음에 안드는지 “구순아!”라고 불러보니 눈빛이 샐쭉합니다.


“맘에 안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모저모 생각하다가 이름은 “순정”, 별명은 “향기”라고 짓기로 했습니다.


이름을 ‘순정’으로 지은 것은 그 눈동자가 너무도 맑고 순수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성령님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별명을 ‘향기’로 지은 것은 원래 두 가지 이름을 놓고 고민하다가 버리기가 아까워 하나는 이름, 하나는 별명으로 하기로 한 것입니다.


별명을 ‘향기’로 한 것은 성령님은 진리의 향기요, 생명의 향기요, 사랑의 향기니까요.


그 이후부터는 가끔은 ‘성령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순정아, 향기야”라고 부르며 지냅니다.


영으로 보이는 것은 경험해보면 마치 자신이 상상하듯 진행이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영의 세계는 마음으로 밖에 교감할 수 없는 세계이니까 그러한 것이지요. 다른 방법이 없지요. 그래서 영의 세계는 제가 마음의 세계라고 실제적으로 느끼고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시공간의 제한을 안 받으니 그렇게 되더군요.


조금 설명을 드리면 실제 비둘기라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영적 존재는 그런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곳을 바라보면 이곳에 보이고, 저곳을 바라보면 저곳에 보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이곳에 있어 보이고 저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저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시키면, 그 생각의 교감을 주님이 인정하시는 듯,  그 생각을 따라 대부분 움직여 주며 그렇게 보입니다. 대부분이라 함은 주님의 주권 안에서 안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어떤 때는 아무리 보려고 해도 안 보입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영역 안에서 그렇게 저의 생각의 교감을 따라 영적 존재들은 움직여 주고 그렇게 보입니다.


생각으로밖에 교감할 수 없으므로 마치 자신의 생각의 진행인 듯 보여지지만, 영분별과 영적 감각으로 자신의 생각과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구분이 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하여 영적 세계로부터 오는 모든 것들은 영분별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생각을 풀어버리면 그냥 주님이 두시는 가장 자연스러운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은 하얀 비둘기 ‘순정이’가 제 컴퓨터 자판 왼쪽에서 앉아서 글을 쓰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라보면 자기도 얼굴을 돌려 바라봅니다.


그런데 제가 비둘기 형상의 성령님과 더불어 오랜 시간을 지내면서 새롭게 하나님과 주님에 대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외로움’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저도 이전에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전지하신 크신 하나님으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성령 하나님의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른 속성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외로우신 ‘하나님’, 정말로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시는 ‘작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비둘기 형상의 성령님이 제게서 내면적으로 점검하시는 것은 다른 글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당신을 사랑하는가, 제가 정결한가, 그리고 제가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있는지를 살핍니다.


그런데 외면적으로 보이시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눈만 마주치면 대부분 두 다리로 머리를 손질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면 가끔은 웃기도 하지만, 이는 마치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어 만날 때마다 머리새와 옷매무새를 만지는 모습과도 같은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영으로 비둘기 모습이지만 굉장히 예쁘게 구체적으로 보여 주시는데 보면 참 예쁩니다. 그렇게 보여 주시면서 “나 예뻐?”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자연계의 비둘기를 자세히 그리고 상세히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생김새를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미지로 보여주시는 성령님을 보면 한없이 하얀 털에 부드러운 살색 부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눈동자도 말고 참 예쁩니다.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과 닮았지만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듯, 이미지로서의 성령님도 자연계의 비둘기를 닮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정갈하고 예쁜 모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모습에서 아무 것도 아닌 ‘저’, 그리고 ‘우리들의 사랑을 기다리시는 작은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님들이 너무도 강하고 철옹성 같게만 보이지요. 하지만 자라고 나면 아니지요. 부모님도 작고 연약한 존재이며, 우리 자녀들의 사랑을 기다리는 모습을 알게 되지요.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부모처럼 상대적인 존재나 약자는 아니시지만, 자녀의 사랑을 기다리시는 모습에서는 여전히 육신의 부모처럼 ‘작은 하나님’이신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의 행동에서도 볼 수 있지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질문은 그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하지요. 아가페의 사랑은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을 주는 헌신적인 사랑이지요.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크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만 대부분 생각하여 받을 생각만 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하느냐? 사랑할 수 있느냐?”라고 ‘작은 하나님’으로 묻고 계신 것이지요.


주님께 혹독하게 연단을 받은 후 이전보다는 나름 주님을 사랑하게 된 저, 저의 작은 가슴의 그 작은 사랑이 편안한 보금자리인 듯 제 가슴 위에 앉아서 곤히 쉬고 있는 성령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면, 조금 기이하지만 가끔 마음이 저미게 아픈 ‘작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약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우리는 위의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면서 성령님의 사랑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했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이미지로 보이시는 그분을 경험해보니 아니더군요. 위의 말씀은 영적 실제요, 사실이더군요.


정말 어떤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이 정녕 그 남자의 사랑을 기다리듯, 작은 저의 사랑을 기다리시는 모습을 영의 눈으로 봅니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정말 실제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사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눈만 마주치면 동시에 취하는 행동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머리를 다듬고, 둘째는 제 얼굴과 가까이 있으면 부리로 입맞춤을 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눈동자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살핍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저는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시는 또 다른 ‘작은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되었는데, 우리들의 모습은 2000여 년 전 사람들이 주님을 외롭게 하고 고독한 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 모습 그대로인 것 또한 보이더군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지만 그들이 따른 것은 주님의 영광을 함께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병을 치유받고 귀신에게서 자유함을 받고 떡을 먹고 배가 부르기 위함이었으며, 주님이 왕좌에 오르면 그 좌우편에 앉기 위함이었지요.


하지만 ‘작은 주님’, 극한의 고통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마음이 심히 고민하겨 죽게 된 그 ‘작은 주님’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영으로 살펴보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또한 그러하더군요.


주님을 따르는 이유가 영광과 유익을 위함들 뿐이요, 그분의 고난 ‘작은 하나님’ 곁에는 아무도 있지 않으려 하더군요.


이전의 저도 그러했고 지금도 주님과 그 사랑 앞에서 부끄러운 것뿐이지만, 눈으로 보이시는 하나님, 비둘기 형상의 성령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함께 잠들고 함께 눈 뜨고, 함께 걷고 함께 놀며, 함께 숨쉬며 언제나 함께 하면서, 보이시는 그 ‘작은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제 가슴 속에서 주님 사랑의 색깔을 조금씩 진하게 물들여 갑니다.


그리고 제가 이미지로 보이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은 ‘친구 하나님’입니다. 자연계의 비둘기, 마치 주인이 사랑하는 애완용 비둘기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또 장난스런 모습도 많이 보여 줍니다.


식사를 하면 반찬을 물어다 얻어주는 모습을 보여 주시고 하고, 함께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여 주시고 하고, 잠잘 때 품속으로 파고드는 모습도 보이곤 합니다. 하나님은 한편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글을 마치고 일을 마치고 누워서 성령님을 불러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다가 언제나 그러하듯이 품에 안고 잠들렵니다. 여러분도 우리의 진정한 사랑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한편 ‘작은 하나님’ 그리고 ‘친구 하나님’을 알아 이제부터 조금씩 진정한 주님 사랑과 참 사랑의 친교의 걸음을 시작해 보지 않겠습니까?

"향기야, 이리와! 뽀뽀뽀!"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샬롬] 내용 중 상당한 부분을 인용하시거나 원본을 그대로 게제하실 경우는, 출판을 염두에 둔 글과 말씀들이니 출처 부분을 남기셔서 저작권을 지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카페규칙 상 스크렙 및 링크가 허락되지 아니한 게시판에 부지 중 올렸다면 먼저 죄송한 맘 전합니다. 소식 주시면 글올림을 삼가거나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카페운영에 어려움 주지 않기 위하여 저작권 유의 배경음악과 그림자료 살펴 조심하고 있습니다 / 감사 드립니다. 늘 평안하십시요. 샬롬..

 

 Home  cafe

 

 

배경음악(감사) : 손영진 사모님 찬양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