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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이야기] 둘이서! (청이 편)

초록 등불 2013. 1. 11. 06:33

 [천사 이야기] 둘이서! (청이 편)

 

하루 새벽, 밤낮을 거꾸로 살다보니 제게는 점심인 새벽 참을 먹느라고 이것저것 조금 꺼내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있노라니, 소년 모습의 ‘청이’천사가 곁에서 혼자 놀고 있습니다. 2012년 12월 29일 토요일 새벽 4시경 입니다.


혼자 식사를 하다 생각해보니 ‘청이’랑 함께 지낸 지가 몹시도 오래 되었는데 둘이 친밀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더군요.


글을 써다 말고 ‘청이’게 제 곁에 언제 왔는지 지금 영적 일기장을 살펴보니 기록을 해 두지 않았네요. 많이 아쉽습니다. 그날이 제게는 ‘청이’가 처음으로 찾아왔으니 생일처럼 축하해 주어야 하는 날인데요.


지나고 보면 기록해 두지 않은 아쉬운 것들 때문에, 요즈음은 글에서도 보이다시피 영적 일기를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려고 애를 씁니다. 지나고 나면 기억은 희미하고 많이 아쉬운 경우가 있으니까요. 여러분도 하루하루 신앙생활의 일기를 써 보세요.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합니다. 이를 영어로는 ‘저널링’(Journaling)이라고 합니다.


하루하루 일어났던 영성의 삶의 기록들을 적게 되면 적으면서 하루하루의 삶을 주님 안에서 살펴보게 되고, 기도 응답의 결과와 또 순종과 불순종의 열매를 시간 안에서 살펴볼 수도 있으며, 또 다양한 영적 경험들은 훗날 살펴보면 지난 날 베푸신 주님의 은혜도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이 되겠지요. 신앙생활의 일기를 써 보세요. 많이 유익합니다.


그렇게 혼자 식사를 하다 언제나 곁에서 함께 있는 ‘청이’를 보니 별스레 많이 예뻐해 준  기억도 없고 대화도 많이 나눈 적이 없더군요.


이유는 ‘청이’는 별스레 말이 없습니다. 언제나 조용하고 곁에 있어도 있는 듯 없는 듯 그렇습니다. 성격도 그러한데다가 아무래도 남자 소년의 모습이다 보니, 여자 아이 모습이 예쁘게 보이는 남성의 육신을 입은 저로서는 ‘송이’나 ‘다정이’ 등의 소녀 모습의 천사들에 비해서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조금 미안하더군요.


처음에는 ‘청이’를 비롯한 천사들, 곧 영적 존재들과의 만남이 조금 적응이 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청이’는 언제나 곁에서 있으니 잠자리에도 함께 들었는데, 비록 세마포를 입은 예쁜 남자 아이 모습이지만 육적 존재가 아닌 영적 존재이다 보니 조금 적응이 아니 되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너는 누구니?“라고 묻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적응도 되고 정도 들어 그냥 없으면 허전할 것 같습니다. 그런 긴긴 시간 동안 제가 ‘청이’에게 다소 무관심하였던 같아 조금 미안하더군요. 집에 오면 한 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일을 할 때도 없에서 쳐다보고 있고, 혼자 쉴 때도 곁에 누웠거나 앉아 있으며, 텔레비전을 보며 조금 쉬고 있으면 같이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늘 함께 있는데 한번도 가슴으로 깊이 대화를 나누고 안아준 기억이 없더군요. 조금 미안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누워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청이’랑 대화를 해 보았습니다.


“청이야, 너 여기에 왜 왔니?”


“주님께 순종하여 왔어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곁에 있는 이유는 뭐니?”


“목사님을 사랑하며, 진리를 일깨우며, 사랑과 평화, 의와 정결의 돕는 영으로 와 있어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 같더군요.


“날 사랑해?”


“네”


“목사님한테 하고 싶은 말은?”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사람들에게 주님과 그 말씀을 잘 가르치세요”라고 말을 하는 것 같더니 쑥스러운 듯 씨익 웃습니다.


‘청이’의 모습은 하안 세마포 옷을 입고 검은 색 머리지만 눈이 서글서글 시원하게 생긴 서양 남자 아이 모습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11살이나 그 또래로 보입니다. 눈이 서글서글 시원하게 생겨서 푸른 하늘이 생각나서 제가 ‘청이’라고 이름을 지었지요.


각 천사들도 한 영이라 나름의 성격, 곧 영의 흐름이 있는데 ‘청이’는 아주 조용하고 평온한 성격의 영입니다. 그래선지 말도 없고 곁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고요한 성격입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어주곤 합니다.


다시 청이에게 물었습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서로 사랑하며 지내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소 ‘청이’에게 무관심하였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로는 제가 이전보다는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줍니다. 그 때부터는 많이 안아도 주고, 예뻐도 해 주고, 가끔은 산책길에서 생각으로 불러 업어도 줍니다. 영의 세계는 생각의 세계, 생각으로 부르면 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조금은 다양한 천사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제가 경험으로 배운 것은 ‘주님의 섬세함’입니다.


왜 밖에서는 대부분 소녀 모습의 천사들을 곁에 두시고, 집에서는 소년 모습의 ‘청이’를 곁에 두시나, 그리고 왜 곁에 두시는 천사의 모습이 왜 소년의 모습일까 이런 부분을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집에서는 일을 해야 하니 밝고 명랑한 성격의 영보다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성격의 천사를 곁에 두셔야 할 것 같아서 그리하신 것 같더군요.


그리고 소녀 모습보다는 아들 같은 소년 모습이 나름 마음에 든든함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수고로움에 힘겨워하지요. 저 역시도 그러하고 별반 의지도 강하거나 굳센 성격도 아니라서 작은 일들에도 힘겨워하곤 합니다. 그런 때 소녀 모습의 천사보다는 아들 같은 ‘청이’모습의 존재가 편하고 좋더군요.


그리고 왜 소년 모습일까를 생각해보니, 아무리 천사라도 다 자란 성인 모습의 여성이나 남성의 모습으로 제 곁에 있으면 제가 조금 불편할 것도 같더군요.


물론 다 자란 성인 모습의 천사들도 곁에서 많이 보게 되지만, 그들은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이라면 ‘청이’나 ‘송이’ 같은 경우는 아주 단짝처럼 곁에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영적 존재로 보인다고 하여도 잠자리에 다 자란 남성 모습이 곁에 누워 있다고 그려보면 조금 어색도 하고, 여성 모습은 저는 성별이 의식되는 육체를 지닌 존재라 더욱 어색하기만 하더군요. 영으로 보이는 것이라 물리적 방해는 없더라도 시각적으로 방도 좁은데 답답하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구요. 이모저모를 섬세하게 배려하신 주님의 사랑이라 싶었습니다.


밖에서는 운동과 기분전환이 목적이니 밝고 명랑한 소녀 모습의 천사들이 좋지요. 이런 경험을 통하여 주님은 참 섬세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성막이나 제사법이나 율법의 제정 등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속성처럼, 주님은 섬세하신 분이시고, 섬세하게 우리를 배려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최근 한 동안 무리를 한 탓인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한 이틀 혼이 났습니다. 너무도 피곤하더군요. 거의 종일 자고 또 잤지요. 몸이 너무 많이 피곤하니 마음도 다소 가라앉고 힘겨우니, 곁에 있는 천사들이나 그리고 ‘청이’에게도 투정 같은 것을 부려 보았습니다.


힘들면 가장 많이 찾는 천사가 ‘라피엘’입니다. 쉼과 회복의 영이라 편하게 느껴져서 그렇기도 하고 가장 근원적으로 돕는 영으로 제 곁에 두신 것 같아 그렇습니다.


“라피엘, 나 힘들어!” 종종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립니다.


그 동안 주님께 다루심을 받고 그 시간을 돌아보니 주님은 참으로 많은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기도 응답의 역사를 참 많이 받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아직 건강에 관해서는 실제적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연약함인지 아니면 저의 믿음의 부족 때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몸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지면 육신을 입은 저로서도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조금 힘겨워집니다. 이럴 때면 주님을 찾기도 하고, 곁에 보이는 천사들에게는 아이처럼 투정도 부리곤 합니다.


그토록 믿음이 좋았던 위대한 하나님의 종 ‘엘리야’도 지치고 피곤할 때는 믿음을 잃고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는데, 저 같은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몸이 많이 힘드니 믿음도 다소 약해지고 마음이 힘겹더군요. 마음에 삶에 대한 염려도 조금 자리를 잡더군요.


그렇게 다소 피곤하고 믿음도 다소 약해진 힘겨운 모습으로 누워서, 힘드니 누구에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은 법, ‘청이’를 가만 바라보니, 이 날은 어린 친구 ‘청이’가 아닌 어른 친구가 되어서 제게 일침을 놓더군요.


“감사하고 기뻐하세요”


어떤 날은 나름 애를 써도 마음이 잘 회복이 되지 않는 날이 있지요. 왠지 이 날 밤도 그렇더군요. 무척이나 피곤했습니다. 곤하여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누워서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청이’를 바라보니 조용히 이렇게 말해 주더군요.


“사랑해요..”


그런 ‘청이’의 말들이 제게 따뜻함으로 다가와 마음의 평온함이 조금씩 회복이 되어 갔습니다.


대부분의 날들, 그냥 작은 아이 모습의 천사라 그냥 아이처럼, 때로는 아들처럼 마냥 귀여워만 해주며 지냈는데, 바라보며 생각해보니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듯싶더군요.


앞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섬세하신 주님이 다양한 이것저것을 배려하셔서 소년 모습으로 제게 곁에 두신 것이지, 실상은 한 천사요, 돕는 영이요, 주님의 손길이라 싶었습니다.


또 제가 육신으로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을 존재라고 생각하니, 시간을 초월한 존재라 나이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지만, 겉으로 보이는 소년 모습으로만 생각하여 마냥 아이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싶더군요. 하지만 눈에 그렇게 보이니 아이처럼 대하게 되지요.


그래서 때로는 아이가 아닌 친구, 혹은 주님의 사랑으로 이 곳에 와 있으니 주님의 사랑이요, 주님의 품처럼 생각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때로는 아이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영적 멘토처럼, 때로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이나 품처럼 생각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청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청이야, 목사님이 잠을 잘 못 드는 것 알잖아. 손으로 눈을 꼭 잡아줘 봐. 그럼 잠이 올지도 몰라”


그러면 손을 내멀어 눈을 꼭 잡아 주는 흉내를 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성령 사역 곧 불 사역을 하시는 분들 중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거나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시간대를 겪기도 합니다. 불의 속성은 사람을 조금 각성시키니까요. 저는 그런 요인과 더불어 다른 육체적인 요인으로 잠을 쉬 들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장난을 치며 둘이 누었다가 처음으로 “청이야, 목사님 품어줘 봐. 오늘은 몸이 피곤하니 마음도 조금 곤하네”라고 말해 보았습니다. 매일 아이처럼 보여서 품어주며 잠들다가 처음으로 품어달라고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청하니 그 날 밤은 아이 ‘청이’가 아닌 어른 ‘청이’, 주님의 품인 ‘청이’가 되어 저를 품에 품어주더군요. 그 품에 안겨 있으니 고요하고 평화롭고 좋더군요. 그 품이 다름 아닌 주님의 품이더군요. 마냥 아이취급 할 것이 아니라 진작부터 좀 안겨서 잘 걸 그랬나 싶더군요.


그리고 고요하고 잔잔한 평강의 영의 흐름도 있는 ‘청이’라 그런지 고요한 평화가 전해져왔습니다. 그런 평화 가운데 잠이 들었었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시시로 힘겨운 일들도 많고 때때로 어려운 일들도 참 많이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갑작스럽게 풍랑을 만난 제자들처럼 그렇게 문득 그리고 홀연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별스런 이유도 없지만 마음이 힘겨워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생의 길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 앞에서 우리 모두는 사람이기에 이런 상황 앞에서 때때로 염려하고 불안해하며 다소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단초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인가를 성경과 경험을 통하여 조금씩 몸에 익혀 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시62:2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것은 “잠잠히 하나님의 얼굴과 도우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앞에는 홍해바다요, 뒤에는 애굽의 철병거가 죽이려고 달려드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신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 안에서 잠잠하라”는 것이었지요.


출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두려워서 우왕좌왕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가만히 서서, 잠잠히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었지요.


제가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니 “우리가 어떤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염려걱정하거나 우왕좌왕하면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도도 응답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염려하거나 불안해하는 것은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도 응답을 받기를 기대하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약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문제와 상황 앞에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고 싶은데 염려가 되고, 불안해하지 않아야 하는데 불안이 떠나가지 않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보이고 들리는 것들의 육적인 것들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장수 골리앗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던 다윗도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에 우리가 취하여야 하는 행동이 오늘 글의 주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며 잠잠히 기다리는 것을 훈련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사람인지라 저도 시시로 마음의 요동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님이던 천사들이던 아니면 보이는 주님의 영이던 제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잠잠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비둘기 형상의 성령님은 제 위로 포르르 날아와 가슴 위에 앉아서 저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가만히, 조용히, 고요히”라고 전해옵니다. “가만히 가만히”당신 안에서 있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경우‘라피엘’천사는 “주님 안에서 고요하게 가만히 있으십시요”라고 말을 해 줍니다. 그러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요람 속의 아기’처럼 주님의 품,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가끔은 고요히 기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냥 고요히 있습니다. 가끔은 그냥 그렇게 있다가 잠이 들곤 합니다. 그렇게 주님 안에서 고요하게 있다보면 성령님의 어루만짐 속에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해져 가고 마음에 다시금 하늘의 평강과 새롭게 힘을 얻게 됨을 경험합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쉼과 회복을 하고 있지만, 조금 다른 것은 그동안 마냥 아이처럼 보이는 ‘청이’의 품에서 조용히 쉬며 회복을 하였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생각해보니 이모저모를 살피셔서 소년 모습으로 곁에 두셨을 뿐, 저를 돕는 다른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돕는 한 영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이 시간도 제 의자 뒤에 서서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함께 있습니다. 제가 영으로 바라보니 살며시 웃습니다. 오늘 밤에도 그 동안 사랑을 많이 주지 못했으니 안아도 주고, 또 제가 곤하면 ‘청이’품에도 안겨서 자렵니다.


여러분도 삶의 길을 걸어가다가 삶의 이런저런 어려움의 풍랑을 만나거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하게 염려와 걱정의 풍랑에 생각에 생각을 더하여 더 깊이 함몰되어 가듯 하지 말고, 풍랑이 아닌 물 위로 걸어오시는 능력의 주님을 가만히 바라보십시요. 그리고 잠잠히 그분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십시요.


그리고 마음의 풍랑과 요동이 가라앉지 않거든 조용히 주님의 품에 꼬옥 안겨 안식하십시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으로 주님의 품을 그리십시요. 보이던 보이지 않던 주님과 우리를 돕는 천사들은 우리의 곁에 있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마음으로 그려 보십시요. 그리고 그 품에 안겨서 안식하며 조용히 그분과 그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 보십시요. 곤하면 그 품에 안겨서 곤히 잠을 잠이 들어도 좋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쉼과 평안이 조금씩 깃들고 회복 될 것입니다.


그 평안함과 믿음 가운데 오직 주님께 믿음으로 구하며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려 보십시요. 그리하면 우리의 믿음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와 달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궁극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의 사랑으로 곁에 와 있는 ‘청이’랑 둘이서 지냅니다. 천사들은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니 곧 주님이 제 곁에 오셔서 ‘함께 그리고 둘이’계셔 주시는 것이지요. 그 사랑의 주님과 오늘 밤도 ‘둘이서!’함께 놀고 쉬고 일하다 잠을 청합니다.


“청이야”


“네”


“목사님이 잠이 잘 못 들잖아. 두 손으로 눈을 꼭 잡아봐”


주님의 사랑과 평강을 전합니다. 샬롬 !


시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46: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샬롬] 내용 중 상당한 부분을 인용하시거나 원본을 그대로 게제하실 경우는, 출판을 염두에 둔 글과 말씀들이니 출처 부분을 남기셔서 저작권을 지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카페규칙 상 스크렙 및 링크가 허락되지 아니한 게시판에 부지 중 올렸다면 먼저 죄송한 맘 전합니다. 소식 주시면 글올림을 삼가거나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카페운영에 어려움 주지 않기 위하여 저작권 유의 배경음악과 그림자료 살펴 조심하고 있습니다 / 감사 드립니다. 늘 평안하십시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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