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를 위해서 영으로 기도, 방언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날씨를 위한 기도가 통역으로 들려나오고 영적 감각으로 날씨가 다소 우려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성령께서는 제 영을 통하여 집회의 날씨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통역으로 날씨를 위한 기도가 들려오니 저 또한 날씨를 위한 간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매번 집회를 위해서 기도하지만 날씨를 위한 기도가 나오기는 처음이었지요.
그런 와중에 성도님 한 분이 신앙상담을 위하여 찾아오셔서 교회에서 만나 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예상 일기도가 전혀 나오지 않은 시간대에 다가오는 집회의 날씨에 대한 우려를 신앙상담 시간에 말씀 드렸었습니다. “기도를 드리니 날씨가 다소 우려스럽게 나오네요”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스마트 폰 상에 예상 일기도가 뜨니, 아니나 다를까 집회 당일에는 ‘비 소식’이, 그리고 전 날은 ‘눈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루하루가 또 흘러가고 정작 집회 날이 다가오자 일기 예보의 기상통보 내용이 하루씩 일정이 당겨졌습니다. 집회 전전날에 눈이 내리고, 전날에 비가 내리고, 집회 날은 날씨가 맑게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시간이 부족하여 운동 외 외출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바깥 날씨를 실제로 잘 살펴보지 못합니다. 그러다 집회 날이 다가와 조금 바쁘다보니 한 이틀 운동도 쉬게 되고 외출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더욱 몰랐지요.
다만 그 전에 외출할 때 유난히 눈이 많은 한 해 겨울의 날씨로 눈길과 빙판길만이 곳곳인 것을 알고 있었지요. 집회 날 아침에야 집회 장소를 향하면서 날씨와 환경의 실제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은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하루의 아침이었지요.
다른 사람들이야 일기예보의 오류나 그냥 자연의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분명히 성령께서 평소에 하지 않던 집회 날씨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통역으로 들었고, 제가 드린 기도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신 기도였기에 하나님의 응답하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요.
더욱 감사하였던 것은 하루씩 일기상태를 당기다보니, 전전날 내린 눈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쌓여서 빙판길을 형성해 놓았던 눈들까지, 집회 전날의 내린 따뜻한 비로 깨끗이 씻어 버리셨더군요. 저의 이동 수단은 차가 아닌 전동 자전거이기 때문에 빙판길은 참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하는데, 말끔히 빗물로 눈까지 모두 치워주셨었습니다. 할렐루야!
정말로 일기예보대로 전날 눈이 내리고 당일 눈이 내리면 우산을 쓰고서 미끄러운 길을 걸어서 갈 수 밖에 없는 저로서는 다소 힘겨운 일인데, 화창한 날씨에 미끄럽지 않은 마치 물청소를 깨끗이 한 복도와도 같은 도로를 열어 주셨으니 기쁘게 달려갔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방언 기도의 필요성과 유익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일반 성도님이 아닌 목회자님들도 방언기도를 사단의 역사로 오해하고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를 흔히 듣습니다.
신약 성경은 성령의 임재하심과 동시에 방언을 말하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 한 가운데는 늘 방언이라는 영적 현상이 따라옵니다. 성경 그 어디에 방언의 역사는 끝났고 방언이 잘못된 것이라는 기록이 있는지, 무슨 영적 근거로 방언을 금하고 못하게 하는지 저로서는 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얼마 전 카페에는 방언에 관한 글을 올렸더니, ‘통변이나 예언의 성격을 띠지 못한 방언’은 잘못된 영적 현상 곧 ‘마귀 방언’이라는 어떤 목회자님의 댓글이 달렸더군요. 과연 그러합니까?
성경이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방언 통변이 되지 않는 상태의 방언도 분명히 있고 그러므로 통변이 가능하도로 사모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통변이나 예언적 기능이 나타나지 않는 방언이 잘못된 방언이며 ‘마귀방언’입니까?
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물론 고린도전서 12장 끝절의 은사는 다른 차원의 깊은 직임적 은사를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도 모두가 통변하는 직임적 수준의 은사가 임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전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물론 간헐적으로 심한 상처나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경우, 그 방언의 숨은 주체가 어둠의 영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통역을 하여 들어보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이나 인간적인 욕설’ 등을 하고 있지요.
또 이런 경우 그 사람의 영을 저의 영으로 접속하여 영을 전이시켜 방언을 해보면, 방언을 하는 모습이 거룩하지 못합니다. 혀를 내밀거나 조금은 이상하게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어둠의 영이 역사하는 방언은 일반적으로 이처럼 방언을 하는 모습도 그리고 소리도 다소 이상합니다.
이런 경우는 방언이라는 은사의 기능을 어둠의 영이 죄나 상처 등을 틈타고 들어와서 역사하는 경우인데, 이러한 경우라도 철저하게 회개하여 영과 마음을 성결하게 하면 다시금 본래의 맑은 성령 안에서의 방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둠의 영이 주관하는 방언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방언이 성령의 방언인지, 어둠의 영이 역사하는 방언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 방언 기도를 통하여 영이 맑아지고 빛이 임하는 좋은 느낌이면 성령 안에서의 방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영이 도리어 영이 어두워지고 마음도 왠지 불쾌하고 힘겹다면 어둠의 영이 역사하는 경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시금 영과 마음을 성결하게 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아주 드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방언기도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마시고 마음껏 하시면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씀처럼, 날로 영이 성장해가고 영적 감각들과 기능들이 회복이 됩니다.
방언의 유익성이 참으로 많지만, 그 중에 강력한 위력 중의 하나가 ‘우리는 전혀 구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이끄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곧 ‘Automatic system'이라는 강력한 유용성의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집회 당일 날 날씨가 어떠할 것인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또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중보기도를 부탁해 오면 제가 무엇이라고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압니까? 하지만 방언으로 기도하면 성령께서 친히 기도를 이끄시니 전자동으로 돌아가는 시스템과 같지요.
어떤 때는 방언으로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그 기도제목은 중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이 ‘하나님 이미 이루시고 응답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 통역으로 들려오면 이미 승리한 일이므로 기도를 그만 하여도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방언 기도의 놀라운 위력 중의 하나는 영적 전자동 시스템인 ‘Automatic'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방언을 이끄시는 주체가 성령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과 로마서 8장의 말씀을 참조할 때,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를 이끄시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방언이 통역이 가능하고 열린 상태이던지 아니던지 간에 구분 없이 방언으로 간구함으로 참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기도를, 그것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를 이끌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얼마나 유익한 일입니까?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방언은 성경의 기록대로 가장 기본적으로 자신의 영의 함양을 위하여 하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중보의 기도나 사역이나 등등에 다양하게 쓰이는 은사가 바로 방언의 은사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드리는 방법은 ‘그 사람을 위하여 중보하는 마음’으로 방언 기도를 드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의 의지를 존중하셔서 그 사람을 위한 중보의 방언을 말하게 하십니다.
통역으로 들어보면 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간구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이끄시는 기도는 대부분 영과 영의 일들을 위한 간구로 실제 생활과 관련된 부분은 아주 간헐적으로 나옵니다. 그 사람의 영과 영적인 생활을 위한 간구를 드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번은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하여 방언으로 중보하는데, 통역으로 들어보니 믿음의 배우자를 위하여 기도하더군요. 이런 경우는 아직 사귀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이러한 방법으로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어떤 사실이나 상황을 알아, 이러한 중보 방언 기도의 통역을 통하여서도 그 사람에게 예언적 성격의 권면이 가능하지요. 성령께서 간구하시는 영역이 그 사람에게 문제인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있으신 분은 가족들을 위하여, 혹은 이웃과 친지들을 위하여, 혹은 교회나 일터 등을 위하여, 그 무엇을 구하던지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마음으로 방언의 기도를 드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 기도 제목이나 대상을 위하여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기도를 이끄십니다.
사역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방언으로 기도하면 어떤 때는 성령께서 친히 어둠의 영을 쫓아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적 지각과 통역으로 어둠의 영을 대적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지요. 영의 눈이 열린 경우는 어둠의 영의 형상을 보게 되지요.
모든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늘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상황과 조건이어야만 역사하시지만, 이런 경우는 성령께서 지금 역사하시는 경우로서 사역자는 그냥 성령이 행하시는 대로 자신도 축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명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치유이던지 혹은 마음의 위로든지 그 무엇이든지 성령께서 앞서 행하시는 대로 사역자는 따라가면 됩니다. 이 또한 친히 앞서서 이끄시고 행하시니 얼마나 전자동 시스템처럼 감사하고 유익한 것입니까?
다만 아직 통역이 잘 되지 않는 분들은 방언 기도만 드리다보면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하니, 구성기도나 묵상 기도 등을 병행하여 다양한 방언기도의 방법을 응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전자기기나 제품을 하나 사면 사용법이 복잡해서 참으로 다 이해하려면 어렵더군요. 그래서 그 모든 기능을 다 알기 어려우니 대부분 ‘auto'상태에 맞추어 두고 우리가 사용하곤 하지요.
실상 영의 세계도 한없이 깊고 넓고 어려운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세계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전자기기의 'auto'기능처럼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계시니 바로 성령님이시고 그 주된 통로 중의 하나가 바로 ‘방언’이라는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언 기도의 유익성을 알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로 우리를 친히 이끄셔서 기도하게 하시는 많은 방언 기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응답의 축복도 가득 누리는 우리 모두이길 기도해 봅니다.
방언의 은사는 가장 기초적인 은사이지만 또한 가장 중요하고 뿌리가 되는 은사입니다. 그리고 방언 기도는 참으로 많은 영적인 유익과 위력을 가진 영적 은사를 활용하는 기도입니다. 수많은 유익과 위력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강력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친히 기도를 이끄시는 영적 ‘Automatic system'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적 유익과 위력을 알아 누구보다도 더 많은 방언을 말한다고 고백했던 사도바울처럼 우리가 수많은 방언 기도를 통하여, 많은 유익과 능력을 누리며 맛보는 우리면 좋겠습니다. 방언은 우리의 영의 함양과 영의 세계를 알아감과 그리고 영적 전쟁 등에서 너무도 유용하고 강력한 능력과 위용의 은사입니다. 할렐루야! 샬롬!
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