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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글] 믿음으로 살아가렴

초록 등불 2013. 2. 22. 05:31

 [영성의 글] 믿음으로 살아가렴

 

이른 아침에 잠이 들었다가 몇 시 즈음인지 모르지만 깬 듯 아닌 듯 잠시 눈을 떴던 것 같습니다. 낮 시간이지만 창을 가려두었기에 새벽처럼 어둡고 잠을 자다 깼으니 기분도 새벽 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깬 듯 아닌 듯 눈을 뜨니 평소 늘 영으로 곁에 보이시는 주님이 방 가운데 다소 큰 모습으로 서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무엇을 말씀해 주시는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한다”입니다.


많은 영적 존재들이 곁에 있고 볼 수 있지만, 특정한 존재를 보려면 생각과 마음을 그 영으로 향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자다가 깨어 깬 듯 만듯한 무의식과 같은 상태에서 보이는 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가장 곁에 두시거나 혹은 느끼게 하시는 경우이지요. 주님도 늘 곁에서 언제나 뵐 수 있지만 자다가 깬 듯 만 듯 무의식과 같은 상태에서 그렇게 보인 경우는 아마도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깬 듯 아닌 듯 눈을 뜨니 평소 늘 영으로 곁에 보이시는 주님이 어두운 방 가운데 평소보다 다소 큰 모습으로 서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무엇을 말씀해 주시는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말을 나눔이 없이 깬 듯 만 듯 하다 다시 잠이 들었지만, 주님이 전하시는 말씀은 “내가 너와 함께 한다”였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꿈인 듯 기억이 나네요.


지난밤에는 집회자료 준비를 하였습니다. 집회에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집회에서 나누는 것은 다양한 자료들을 참고로 저의 신앙관이나 영적 경험에 맞게 적절하게 손질하여 나누기도 하지만, 저만의 독창적인 자료들도 많이 나눕니다.


자료들을 살피거나 혹은 말씀을 읽거나 기도를 드리다 보면 어떤 영감이 순간순간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주어진 영감 안에서 제 나름의 논리로 질서정연하게 구성하여 함께 나누지요.


지난 집회에는 수많은 영들의 작용을 전자기학의 전파와 파동에 비유하여 ‘영의 파동’이라는 내용을 나누었는데, 전자기학이라는 과학에 비유하며 설명을 드려야 하므로 전자기학, 물질의 기본단위, 양자역학, 파동학 및 파동 의학 등 과학적 지식도 많이 필요했지요. 이런 경우 주어진 영감을 과학적 비유로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자료도 찾아보아야 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다보니 집회자료 준비를 하는 밤이면 제 방에는 온통 이런저런 자료들 투성이입니다. 어느 한 자료에 다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자료들을 살펴보아야 하니까요.


그렇게 이런저런 자료를 찾고 나눌 자료를 조직적으로 구성하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립니다. 이 밤도 그렇게 어느 새 이른 새벽시간이 되었더군요.


체력 상 더 많은 일을 하기 힘들므로 오늘의 집회자료 준비는 마무리하고, 조금 누워 쉬면서 우연히 이전에 전공하였던 과학에 대한 영상, 우주의 근원적 물리학적 방정식을 찾는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물리학을 전공하였기에 나름 흥미롭더군요.


고전적인 중력의 개념,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한 시공간의 휘어짐의 중력에 대한 다른 설명,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모순과 충돌, 그것의 통합을 시도해 가는 과학자들의 이야기, 입자와 파동이라는 일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충돌을 통합해 보려는 새로운 이론인 ‘끈 이론’등 다양하고 재밌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더군요.


다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그런 우주 공간에 대한 근원적이며 거시적 물리학 이론이나 극미한 초미세의 세계를 다루는 일상으로 경험하는 세계와는 전혀 현상이 다른 양자역학 등의 현상과 이론들을 보면, 그 이론들은 현상을 설명하는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가변적 논리의 체계일 뿐 참과 진실은 아니지요.


하지만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낸 고도의 수리물리체계의 이론을 보노라면 한편 이 자연세계가 얼마나 오묘하게 지어졌으며,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오묘하심과 신비로움, 온 자연에 가득한 하나님의 신성을 보게 되지요. 정말 자연은 신비로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렇게 흥미롭게 모처럼 현대과학의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이른 아침이 되었더군요. 식사를 하고 잠이 들 시간이 되었기에 간단하게 차려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식사는 늘 다소 간단하게 합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마음속에 다소 건강에 대한 생각이 자리를 잡더군요. 한 이틀 조금 무리를 하였더니 몸이 조금 무겁기도 하였구요. 사실 지금 제가 감당하는 일의 양들이 자연적인 체력으로 보면 조금 무리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부지런해야 한다는 성경의 말씀을 좇아 정말 열심히 삽니다.


게으르면 가난하게 되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고,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말씀하니까요. 저는 성경을 새롭게 보면서 한 구절 한 구절이 참이고 진리임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게으르면 가난해 집니다.


잠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렘48:10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이고 ‘게으르면 가난해진다’라는 것이 분명한 영계의 법칙이며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기에 나름 열심히 살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 모두 큰 부를 향한 마음은 없다 하더라도 가족부양과 같은 삶을 위한 물질의 필요가 적잖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르면 가난해 집니다.


이것 또한 가슴으로 깨달았기에 집회 오시는 분들에게도 “부지런하세요”’라고 자주 말씀도 드리지요.


우리는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우리 생이 어물거리고 있을 만큼 그렇게 길지도 않거니와 이 땅의 한시적인 삶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이라는 상급을 쌓는 유일한 시간이니까요. 두 번의 기회는 없으니까요.


더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반열과 상급의 차이가 없으며, 또한 차이가 있을지언정 어떠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성경은 반열과 상급의 차이를 말씀하고 있으며, 받고 누리게 되는 반열과 상급에 따라 누리게 되는 기쁨도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것들은 모두 바람처럼 사라지지만, 그곳은 영원한 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열과 상급에 따라 누리게 되는 영광과 기쁨의 차이가 없다면 성경이 왜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라하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의 좌우편과 같은 영광의 자리를 말씀하고 있겠는지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보고 들은 사도바울은 그 나라를 침노하기 위하여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처럼 자신도 살았고, 우리에게도 권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런 깨달음이 있었기에 다소 부지런하게 살지만, 우리의 몸의 건강도 생각해야 하는 법이라 적절하게 휴식도 가지면서 조절을 잘 하는데 왠지 다소 몸이 평소 같지 않고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하면서 건강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자리를 잡더군요.


저는 병증으로 쓰러져 본 뒤에야 우리 몸이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로우며 정말 하나님의 신성과 기운이 흐르고 있음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 ‘나로호’우주로켓이 발사되었지요. 그 로켓의 발사를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부품들이 필요하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발사가 실패합니다. 그래서 실패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몸은 그러한 우주로켓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대략 60~1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기막히고 정밀한 기계와도 같습니다. 오장육부를 비롯한 신경, 혈관, 근육 등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이상이 오면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요.


사람 몸의 혈관의 총 길이는 지구둘레를 두 바퀴 반이나 도는 거리인 96,000KM라고 합니다. 우리 몸의 피는 심장에서 나와 심장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하루에 천 번이이나 이 일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할 수 없이 복잡한 혈관이나 신경이나 몸의 그 어디 한 곳의 이상만 생겨도 우리의 몸은 아프지요.


그래도 그 수많은 조직들이 나름 긴 세월 대부분 정상적으로 활동하며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니 얼마나 하나님께서 오묘하게 지으셨고 당신의 손길로 우리의 몸을 지켜주시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몸이 복잡하게 구성되었고 그 어디 하나라도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않으면 건강에 이상이 온다는 것을 병증을 통해서 알게 된 후,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십조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은 우리 몸이 나름 긴 세월인 수십 년을 견디어 내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요, 지켜주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그냥 별스런 생각 없이 살 때보다는 또한 그렇게 인체가 말할 수 없이 수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진 정밀한 기계와 같으니 더욱 건강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지요.


그리고 자동차 사고를 당해본 사람은 사고에 대한 다소의 생각이 마음에 자리를 잡듯이 저의 경우엔 건강관리와 몸 상태에 대한 생각이 다소 마음에 자리를 잡았지요. 그래서 이전보다는 다소 평소에 건강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곤 합니다.


그렇게 다소 곤하기도 하고 건강에 대한 생각으로 조금은 무거워진 마음으로 혼자 간단히 식사를 하고 있노라니, 제 마음의 이러저러한 생각을 아셨는지 제 앞에 주님이 앉으시더니, 간단하게 한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렴”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건강을 관리하고 유의하는 것도 좋지만, 근본적인 마음의 바탕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집회 등을 저를 만나 보신 분들은 겉모습이 멀쩡해 보이니 어떻게 몸이 불편한지 잘 모르시겠지만, 내적으로 느끼는 몸의 곤함은 평소에도 많이 곤합니다. 20~30여년의 이러저러한 병증으로 이런저런 몸의 내적 불편함을 늘 느끼지요. 다소 무리하거나 피곤하면 몹시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람인지라 가끔은 건강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다소 무거워지기도 하지요.


주님의 다루심을 통하여 이 땅의 생은 본질이 아님을 알기에 한편 겉옷에 불과한 육신의 죽고 사는 것에 궁극적 미련은 없으나, 다소 몸 상태가 좋지 않아지곤 하면 저의 역할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의 책임감이나 생에 대한 본능적인 그런 마음으로 조금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지요.


그런 마음을 주님이 읽으셨는지, 평소에는 늘 배경인 듯 천사들에게 근처의 자리를 내어주시고 계신데, 식사 시간에는 근처의 자리로 나타나셔서 “믿음으로 살아가렴”이라고 말씀을 해 주시더군요.


그 말씀을 들으며 식사를 하고 있노라니, 공중의 새나 들의 풀도 입히시고 기르시는 하나님, 모든 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고 마음에 다소 믿음과 평안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타나고 보이시면 항상 어린아이와 함께 보이십니다. 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제게 매달리기도 하지요. 그래서 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주님, 왜 매번 아이들이랑 함께 보이세요?”

“만물은 내가 지었고, 모두 나의 아기가 아니냐?” 언젠가 대답하셨듯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주님을 마주보며 잠시 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이 동일한 의미의 말씀을 덧붙여 조금 더 하시더군요.


“믿음으로 살려무나. 만물은 말씀으로 지어졌고 만물을 붙들고 있는 것도 말씀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나이다”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으로 살려무나. 내 품에 안긴 아기천사처럼”


“평안하여라. 고단할 텐데 쉬고 자려무나. 하루의 삶도 평안할 것이다”


저는 타고난 성정이 마음이 굳세고 의지가 반석처럼 굳건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감정과 감성이 섬세한 편이라 작은 일에 기뻐하고 작은 일에 슬퍼도 곧잘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다소 굳건한 믿음을 내어 보이는 일에도 서툴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향한 참 믿음이 필요한 목회자로서는 어쩌면 자질이 부족하지요. 그렇게 마음과 믿음도 약하고 자질이 부족하니 주님과 온갖 돕는 영들도 저를 도와주시나보다 혼자 생각해보곤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도와주시나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주님이 다소 그렇게 위로의 말씀을 해 주고 가셨지만, 마음의 평안이 온전히 회복은 되지 않더군요. 조금은 그런 마음으로 곁의 천사들을 가만 바라보기도 하고, 쿨만 모습의 누님 같은 돕는 영에게는 안겨도 보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잠시 잠이 깬 듯 아니 깬 듯 잠시 눈을 떴었습니다. 눈을 뜨니 어두운 방에 주님이 평소보다 다소 큰 모습으로 서 계신 것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열린 환상은 육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아서 어두우면 어둡게 보입니다.


잠도 덜 깬 의식도 제대로 들지 아니한 상태였지만, 주님이 왜 그렇게 서 계신지 그리고 무엇을 말씀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래도 다소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지 못한 저를 위로 하시려 거기 서 계신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소 의식이 온전하지 않았지만 주님이 그렇게 제 방 가운데, 제 곁에 그렇게 서 계시니 마음이 포근하더군요. 그 포근함 속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생을 살아보니 사람은 참 위대하고 강한 존재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 정말로 약하고 약한 존재임을 또한 알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다소 놀라운 일들을 해 나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도 우리는 연약하며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절이 필요한 존재임을 느끼게 되지요.


성경 속의 인물을 보아도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던 엘리야도 자신의 생명을 집요하게 쫓는 상황에서는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나약함 앞에서 하나님께 하소연하듯 차라리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주실 것을 읊조리기도 하지요.


엘리야도 그러하였는데 같은 성정을 지닌 우리 또한 때로 강하나 때로 너무도 약해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도우심을 간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121: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러나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그 음성을 듣고 새롭게 일어섰던 엘리야, 마지막 남은 소명의 길을 다 달려간 뒤에 하늘의 불말의 불수레를 타고 영광스럽게 승천하였던 엘리야처럼, 우리도 늘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금 믿음으로 오뚝이처럼 늘 다시 일어서서 남은 소명의 길을 아름답게 달려가는 우리 모두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른 아침 시간 이런저런 일들로 다소 마음이 무거운 채 식사를 하고 있는 저를 향하여 한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우리 모두의 온 가슴에 고요한 평강으로 울렸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간단히 한 말씀 전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렴..”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시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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