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낮 시간에 바깥나들이를 하며, 그래도 내 고향 풍경이 조금은 담긴 들판을 나란히 달리는 도로변을 자전거를 타고 달렸습니다. 조금은 흐릿한 날씨, 아직은 겨울의 그림자가 채 지워지지 않아서 조금은 가을의 날씨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가을 같기도 한 이른 봄날 속으로 자전거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마주한 채 자전거를 타고 오랜만에 달려보았습니다. 하늘에는 또 처음 보는 소녀를 닮은 듯한 예쁜 소년 모습의 천사가 나타나 저와 함께 날며 따르며 즐거워합니다.
하얀 세마포 옷, 뽀얀 피부에 맑은 눈망울로 바라보며 하늘을 날며 함께 즐거워해 줍니다. 육의 눈으로 바라보면 저는 이른 봄날 속을 달리고 있고, 영의 눈으로 보면 저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봄날 속으로, 그리고 하늘 속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몹시 아픕니다. 집회에 오시는 분들은 저의 외면만 보고 제가 건강하고 아프지 않은 줄로 압니다. 하지만 저는 몹시 아픕니다. 외적인 병증이 아니라 내적인 병증이라 저만 알고 느끼는 통증과 불편함이지요.
때로 조금 상태가 좋기도 하고 때로 조금 상태가 나빠지기도 하지만, 조금 많이 컨디션이 나빠질 때는 사람들에게 도무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정도로 통증과 불편함과 피로감을 느낍니다. 이러한 시간에는 정상적인 생활도 힘이 들지요.
사실 글을 쓰는 이 시간도 정상적인 사람이 갑자기 제 몸의 통증이나 불편함이 임하면, “어떻게 저런 몸으로 일을 할까?”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내성이 길러지고 이력이 났지요. 그렇게 아프면서 살아왔고 아프면서 일해 왔지요.
한 동안 다소 무리한 탓인지 며칠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을 잠시 손에서 놓고는 잠도 조금 푹 자고 휴식 겸 나들이를 하곤 하였습니다. 또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나의 봄이 찾아왔으니까요.
어젯밤에도 그런 피로감에 다소 일찍 잠자리에 들고는 정오 즈음에 눈을 떴습니다. 다소 심한 피로감을 느끼다 보니 조금은 보양식을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근처의 식당을 찾아가 식사를 하였습니다.
가끔 이렇게 힘들 때에는 늘 곁에 영으로 보이는 주님을 보며 본능적으로 도와주심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지요.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주께서 무엇을 능히 행하지 못하시랴마는, 저의 믿음의 내어보임의 부족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나 하나님의 섭리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아직은 실존적으로 치유를 받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치유해 주시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의 고백이 아닌 실제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눈빛으로 제게 전하시는 말씀은 “나는 부활과 생명이니,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과 “그래도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그러하니 순종도 하거니와 또한 믿음도 생기고 담력도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는 친구 목사님을 모처럼 방문하여 교회와 사역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보통 하늘의 이런저런 꼬마 천사들이 제 앞으로 걸어와 쏘옥 안기곤 합니다. 영으로는 예쁜 아기 천사들의 모습에 웃기도 하며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친구 목사님과 나눈 그런 신앙적 대화 속에 제가 그동안 느낀 삶과 신앙의 실존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자세히 설명 드려볼까 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지식과 관념과 막연한 생각으로는 알고는 있으나, 실존적으로 경험하지 못하여 정녕 가슴으로는 모로는 상식이지요.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는 궁극적인 행복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나이가 많은 편도, 그렇다고 결코 적은 편도 아닙니다. 의학의 발달로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진 관점에서 보면 아직도 수십 년의 세월은 더 살 수 있는 나이이지요. 하지만 제게는 남들이 가진 강건한 몸과 건강이 지금은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약하게 타고 났고, 선천적으로 유전적 소인으로 내적 병증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병든 몸으로 수십 년을 살아오다보니, 가끔 상태가 나빠질 때의 제 몸의 느낌은 마치 건물이 오래되어 허물어져 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지요.
그런 저의 현재적 실존 속에서 ‘인생’을 바라보면, 이 땅에는 궁극적 소망이 전혀 없더군요. 그리고 그 생각을 인생 전체의 실존에서 바라보아도 마찬가지이더군요.
지금의 제게 그 무엇이 궁극적 소망이 되며 기쁨이 되겠습니까? 세상의 사람들이 신이라고 까지 부르는 재물일까요? 한번 그 맛을 보게 되면 놓지 못한다는 권력일까요? 혹은 인생들이 그토록 노래하는 사랑일까요? 또 다른 세상의 그 무엇이 참된 소망이 될까요?
제가 저의 현재적 실존 속에서, 나아가 인간 모두의 현재적 실존 속에서 가만히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살펴보니,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의 궁극은 슬픔이요, 어두움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에는 양지가 있으면 반드시 음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슬프게도 양지가 밝으면 음지도 더 어두워집니다.
가령 우리가 세상에서 그래도 영원한 의미를 가지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랑’도 그 사랑의 깊이가 깊어갈수록 언젠가는 다가올 이별의 아픔의 깊이만 사실상 더해 가는 것이기도 하지요. 재물도 그러하고 명예도 그러하고 이 세상의 것은 더 밝고 높고 많으면 그 상실의 음지도 그만큼 어두워져 가는 것이더군요.
그리고 이 세상의 것을 궁극적으로 좇는 삶에는 반드시 그 영혼에 어두움과 타락이 깃들게 되고, 마침내 그 영혼과 육체가 망하는 것을 실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을 궁극적으로 좇더라도 인간의 영혼은 어두워지게 되어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어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멸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더군요.
그러므로 우리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직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그 바탕 위에서 삶과 생을 건설하지 않으면 다 모래성이요, 아픔뿐인 것입니다.
진리요, 참인 하나님의 말씀은 정녕 그리고 분명히 우리에게 이것을 각인시켜 주고 있지요.
마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런데 제가 생을 살아보니, 이전의 저도 그랬거니와 사람들은 조금만 그리고 잠시만 생각해보아도 알만한 이 진리를, 깊은 고난의 다루심을 받아 가슴으로 알기까지 그토록 인생과 세월을 낭비하며, 그래도 땅에 궁극적인 행복과 소망이 있는 줄로 알아 자꾸만 하늘의 것이 아닌 땅의 것을 찾으며, 위엣 것이 아닌 아래의 것을 찾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과 진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아, 하늘에 속한 것,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물론 이러한 저의 말씀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비관적으로 바라보라는 그러한 말씀은 아닙니다. 무엇이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이며, 우리의 삶과 생과 꿈을 무엇 위에 세워나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이 세상의 것을 좇는 삶이 서로 반하고 충돌하는 선택의 순간과 시간 속에서, 지혜롭지 못하게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 땅의 것을 선택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게 됩니다.
저는 육체의 아픔을 너무도 겪으며 살아왔었고, 그리고 사망의 문턱에도 가보았기 때문에, 저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죽음’이라는 냉혹한 실존의 문턱 앞에 서 있는 것을 정녕 압니다. 종말의 그 시와 때를 아무도 모르듯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생은 순간이며 언제나 우리는 ‘죽음’과 그 너머에 있을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의 문턱 앞에 서 있는 것을 정녕 압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살 것처럼, 땅에 우리의 궁극적 소망과 행복이 있는 것처럼 속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도리어 하나님 안에서의 고난을 자청할 수 있는 지혜로운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제가 주님의 혹독한 다루심 안에서 실존적으로 많은 것을 깨닫고 보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궁극적인 행복이나 소망은 없습니다. 단지 삶과 생을 위한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생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꿈이나 자아를 펼칠 수는 있지만 그것 역시 영원한 의미를 갖지는 못합니다.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바탕 위에서 자신과 생을 세우려한다면 인간의 영혼은 어두워지고 타락하고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상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세상의 것도 궁극적으로는 다 빼앗기게 됩니다.
재물을 좇는 자는 재물 때문에 결국 망하게 되고, 정욕을 좇는 자는 결국 정욕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삶,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삶 위에, 결코 무너지지 않는 영원과 의미가 지어져 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과 생 위에 이 땅의 꿈과 자아의 실현이던지 생의 필요든지 의미성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세워집니다.
이전의 제도 그러한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기에 인간적으로는 말할 자격도 없지만, 주님의 다루심을 통하여 깨닫게 된 주의 종의 본분으로, 신앙상담을 하던지 집회를 인도하던지 이러한 가슴의 진실을 알려주고 깨닫게 해 주려고 하여도, 여전히 땅의 것에 진정한 행복과 소망이 있는 줄로 알고 대부분 여전히 그 길을 가시려 하고 또 그 길을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생의 해가 저물고 하늘의 별도 떨어지고, 준엄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앞에 서게 될 테인데도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생명과 세세토록 고난의 연기가 올라갈 수 있는 영원한 두려운 사망의 문 앞에 서게 될 테인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자 성정인가 봅니다. 저 역시 지금은 이렇게 전하고 있지만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신 말씀처럼 늘 먼저 저 자신을 돌아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정로를 따라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볼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늘 천사들과 마치 일상 속의 사람들과 지내는 것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목사님처럼 그런 경험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영의 세계와 법칙을 살펴보니, 예외가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영적 경험은 사명을 위하여 주어집니다”. 사명은 곧 한편 십자가요, 고난이므로 영적 경험의 깊이만큼 사명과 고난의 깊이가 깊습니다.
주님 안에서 겪어야 할 고난의 깊이가 깊기에 그것을 지탱할 수 있도록 영적 경험을 시켜 주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참고로 영적 경험은 영적 성장이나 믿음과는 직접적 관계는 없습니다.
어쨌거나 제게는 그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이든지 혹은 저의 부족함에서든지 아픈 세월을 살아왔고 혹독한 다루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처럼 생의 두려운 시간의 얍복 강가에서 저의 자아의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참 길고도 험난하고 아픈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주님은 그 부러진 환도뼈의 아픔과 고통을 다소 깊은 영적 경험으로 버티게 붙잡아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러져보지 않은 분들을 위하여, 저처럼 부러지지 전에 깨달아서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위해서 살라’라고 외치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경외하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섬기며 살라’고 외치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실존적으로 경험해보니 영적 성장에 비례하여 하나님을 사랑도 하지만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정도가 자신이 이룬 영적 성장의 정도입니다.
제가 신앙상담을 하거나 집회를 인도해보면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저의 말을 듣는 그 순간만큼이나마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저의 말이 단순한 이론과 지식이 아닌 뼈아픈 시련과 눈물 속에서 머금은 진주의 진리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영적 성장과 뿌리가 약하여 삶으로 이어지는 분은 많지 않음도 보게 되지요.
다시 한번 글을 통하여 저와 우리 모두를 향하여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마십시요. 이 세상에는 궁극적 행복이나 소망은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하나님 사랑, 그 안에 진정한 행복과 소망이 있고, 그 안에서만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 안의 것이 아닌 하나님 밖의 그 어떤 것을 궁극적으로 추구하게 되거나 사랑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어두워져가고 타락해져 가고 멸망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심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애쓰십시요. 그리하여도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가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적 그리고 영적 실존입니다. 하물며 마음의 궁극이 세상을 향하고 있다면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참이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좇아, 전심과 진심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하기를 애쓰며, 말씀과 기도에 성실하며,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래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머물게 되며, 참 빛 안에 머물게 되며, 그 빛 안에서 궁극의 소망과 행복을 보게 되며,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을 때에 우리의 주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수많고 무수한 말씀 중에서 가장 뿌리가 되며 근간이 되며, 가장 핵심적인 우리의 삶의 지침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정녕 저와 우리 모두의 심금을 울리며 들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지혜로운 생명의 삶이 무엇인지를 실존적으로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는 죽는 것이 사람이기에 생물학적 본능으로는 다소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믿음 안에서는 없습니다. 그토록 아픈 세월을 살아왔고 환도뼈가 부러진 채로 걷고 있으려니 생에 대한 미련도 그다지 없습니다 ^^
지금은 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주님 앞에서는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함이요, 제 편에서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쌓고 싶은 선한 욕심이요, 인간 편에서는 부모의 자녀로, 자녀의 아버지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의 본능이 아니라 오직 이 한시적이고 유한한 이 땅의 생명의 시간에서만이, 하늘의 영원한 상급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기에, 생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그 영원을 침노하는 마음으로 비록 미련은 없지만 빨리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로 불러달라는 마음도 없습니다. 하루라도 더 시간을 주셔야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작은 영의 열매라도 더 맺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한편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달란트는 생의 시간이지요.
저는 지금 많이 아픕니다. 그리고 때때로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프면 신음을 토하게도 되지만, 그렇게 연연하지는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무엇이 본질이며 영원인지를 알았기 때문이요, 어쩌면 그런 어려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려 애쓴 몸짓이 더 의미 있는 일이요, 영원한 상급이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숱한 고난의 세월과 시간 속에서 마음의 환도뼈도 부러졌고 몸의 환도뼈도 부러졌지만, 부러진 환도뼈를 버티게 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웃으며 이 가슴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육으로는 고향 풍경을 담은 들녘과 나란한 봄 길을 달리며, 영으로는 하늘의 천사들과 하늘을 달리며 이 가슴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십시요. 그리고 정녕 기뻐하며 살아가십시요.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과 영생의 소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닌,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이며, 우리 또한 믿음으로 그러하지 않습니까?
오직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또한 범사에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십시요. 그리고 결단코 세상을 사랑하거나 향하지 마십시요. 우리에게 주어진 천국의 소망이 그렇게 실제이듯이, 우리에게 말씀된 영원한 사명의 형벌도 실제이니까요.
범사에 감사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사랑과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