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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진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초록 등불 2013. 3. 11. 18:03

 [핵심 진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오랜 시간 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다면 서로 포옹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몸짓과 말과 마음으로 서로 사랑의 교감을 나누겠지요.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유리벽이 있다면 어떨까요?


사랑하지만 서로 안아볼 수 없어 애타는 몸짓을 유리벽 사이로 서로 전하겠지요.


제가 천사들을 경험해보니 저는 육의 공간에 있고 천사들은 영의 공간에 있으니 어떤 감정을 깊이 전하고 싶을 때 마치 유리벽 저편의 연인처럼 천사들이 그렇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주님께서 천사들이 실제의 육체를 입은 사람처럼 우리가 만지고 포옹할 수 있게도 하실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이례적인 일이겠지요.


제가 경험해보니 사람의 영이 성장해가면 영적이든 혼적이든 감정의 폭이 좁아져 갑니다. 크게 기뻐함도 크게 슬퍼함도 없이 평온함과 고요함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시시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폭이 줄어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루는 그렇게 고요해져 가는 성정 안에서 조금은 힘겨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섰던 것 같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그런 감정 변화의 요인은 다양하겠지만, 대부분의 육체적인 힘겨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고 일어난 시간부터 다소의 시간이 흐르기까지 다소 힘겹기 때문에 그런 시간이 조금은 마음이 힘이 들곤 합니다. 아마도 그날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런 날은 육체의 기력이 다소 없으니 산책도 아주 고요하게 합니다. 걷는 듯 아닌 걷는 듯 조용히 걷다가 벤치 앉아서 쉬다가, 하늘나라 천사 공주님들과 조용히 교감하다가 들어오곤 하지요.


하루 저녁 그렇게 조용히 산책을 하고 들어와서, 곤하여 쉬며 조용히 텔레비전을 잠시 보고 있었습니다. 가끔 큰 의미 없이 저녁에 잠시 쉴 겸 보는 텔레비전이지만, 마음은 눈의 창이라고 제 마음이 다소 힘겨우니, 텔레비전 속 세상의 풍경도 다소 힘겨워 보입니다.


정말 우리네 삶의 실존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삶의 기쁨도 적지 않게 두셨으나 이는 잠시 스쳐가는 그림자요, 죄의 삯으로 말미암아 궁극은 수고와 눈물과 한 숨 뿐인 것을 삶의 시간 속에서 더욱 알아가게 되지요. 우리의 참된 소망은 하나님과 그 나라인 것을 더욱 알아가게 되지요.


그것을 참되이 알아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 모두면 좋겠습니다.


그 때 쯤 사랑의 천사 ‘린’이 제 앞에서 뚜렷하고 큰 모습으로 나타나 일렁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에서 기록한 것처럼 유리벽 저편의 연인처럼 다소 큰 얼굴로 나타나 제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일렁거립니다.


때로는 만져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 듯이 저의 몸을 감싸고돌기도 합니다. 다소 큰 얼굴을 마주하고는 이러 저리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전해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보던 의식을 영으로 돌려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린아, 왜 그래?”


다소 큰 얼굴의 금발의 여왕 같은 모습, 그리고 한없이 맑고 맑은 눈빛으로 ‘사랑의 영’을 흘려보내며 저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말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되어, 그 사랑의 영을 제게 흘려보내주고 있었습니다. ‘린’은 경험상 사랑의 영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것처럼 영적인 존재들과는 눈으로 많은 교감을 나누게 되는데, 그 맑고 별빛 같은 눈동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또 다시 제가 물었습니다.


“린아, 오늘 갑자기 왜 그래?”


그 때 ‘린’이 영으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기뻐하세요. 기뻐하세요”


경험상 천사들은 우리들은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고, 천사들의 감정과 마음은 주인인 우리의 마음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육체의 힘겨움으로 마음이 다소 힘겨웠지만 밝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래, 알았어. 나 기뻐할께. 기뻐”


그 순간 천사 ‘린’의 눈동자가 하나님이 계신 보좌를 향하여 경배하는 듯 저 높은 하늘을 향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한 마디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성경에는 나오지만 영적 존재인 천사가 우리처럼 할렐루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처음 들었고 보았습니다. 아마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대상인 제가 자기의 조언을 따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힘겹지만 “기뻐할께”라고 말을 하니,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집회에 오신 분들에게 한번 말씀드린 기억이 나지만, 천사들의 모습이 다 참 예쁘지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얼굴을 마주하고는 순간 하나님을 경배하는 듯 얼굴과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 입니다. 너무도 고운 얼굴과 맑은 눈빛, 그리고 아름다운 속눈썹이 자아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사도바울도 육신의 연약함을 안고 살아가게 하셨지만, 저도 저의 부족함 탓도 있겠지만 참으로 아픈 삶의 실존에서 실존적으로 참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전하게 하시는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그날 하루는 육적으로 힘겨운 가운데 하나님이 저와 우리 각자의 생을 때로 고통스럽게 이끌어 가시는 섭리를 다 이해하고 알 수는 없지만, 천사 ‘린’을 통한 위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기를 또 다른 실존에서 경험한 하루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비록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우리보다 높은 생각과 경륜으로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런 시간을 경험한 후 조금 지나 또 며칠 몹시도 아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다소 아픕니다.


어제 우연히 텔레비전 방송에서 류머티즘 계열의 저와 비슷한 병증을 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 저와 완전히 병명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경험적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더군요.


가령 저도 몇 번 앓아본 눈의 포도막염이 자주 올 수 있다거나, 심할 때는 통증이 극심하지만 진통제가 잘 듣지 않는다던가, 자고 일어나서 한 참 후에야 몸이 다소 가벼워진다던가, 또 현대 의학적으로는 발병의 원인도 정확히 모르고 그러므로 온전한 치유방법도 없다는 그런 이야기들이 저의 경험상 와 닿더군요.


가끔은 별스런 이유 없이 이렇게 더 아프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일상적인 생활도 다소 힘겹지요. 쉬지 않고 느껴지는 통증성 피로감으로 그냥 자고 자고 또 쉬고 쉬어도 피곤함을 계속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제가 책임져야 하는 삶의 영역과 또 감당해야 하는 사역의 영역 등으로 인해서 마음이 조금 힘겨워지기도 하지요. 그렇게 하루 다소 힘겨운 몸과 마음으로 눈을 떴던 것 같습니다.


부스스 눈을 뜨니 영으로 보이는 주님께서 저를 무릎에 누인 채 안고 계셨습니다. 평소보다 다소 큰 모습으로 앉으셔서 저를 무릎머리로 하신 채 안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다정스럽게 저를 안아 주시는 모습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늘 곁에 애완용 비둘기처럼 보이는 성령님께서도 그 날만큼은 제 방 위를 빙그르 돌면서 날고 계셨습니다. 친구 성령님의 모습으로가 아닌 전능하신 주의 영의 모습으로 제게 보여주시며 힘과 용기를 전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시시로 그렇지만, 그날도 수많은 천사들이 열어지어서 저를 보며 더욱 환하게 웃어주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사람들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나 모두 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때때로 삶의 시련과 고난의 시간을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듯 이러한 고난과 시련의 시간도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썩고 죽을 육이 아닌 영원한 영의 생명과 보화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저도 가끔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저의 삶과 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의 길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우리보다 높으며,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러한 삶의 여정 모두가 마침내는 합하여 선을 이루게 되며, 우리를 복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제게 이르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은 생의 수고로움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의심한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살아가다가 삶의 수고로운 시간을 만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궁극의 마음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높고 영원한 섭리의 경륜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로 인도하시면 곧장 그 의미와 섭리를 모른 채 감사를 잃어버리곤 하지요.


가끔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다가 어떤 불치병에 걸려서 의학적으로 사망의 선언을 받는다면, 인간의 방법과 수단으로는 도무지 빛과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환경 속에서 인간적인 절망을 맛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모든 인류는 원죄로 말미암아 사실상 모두 이러한 실존에 놓여 있습니다.


육의 세상에서 육신의 방법으로는 궁극적으로 탈출구가 없는 삶을 우리는 모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육체의 죽음이라는 한계적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때로 만나는 가벼운 상대적 한계상황이나 혹은 도무지 사람으로서는 벗어날 길이 없는 절대적 한계상황은 우리의 삶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우리의 환경을 어떻게 인도해주시느냐에 초점이 있으면 어려워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를 잃어버리게 되고, 절대적 한계 상황에서는 하나님과 그 사랑을 부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증거는 원죄로 말미맘아 그런 상대적 그리고 절대적 한계상황의 절망의 어두움에 사는 우리를, 썩고 쇠하는 육의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영원히 살도록 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보혈로 건져내시고 이 땅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성경 그 어디에서나 궁극적인 생명과 행복과 빛은 이 땅에서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위엣 것을 향해 살며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궁극의 소망과 마음이 하늘에 있음을 깊이 인식하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환경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말씀의 반석 위에 선 굳건한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함”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생의 과정 속에서 때때로 삶의 이런저런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영적으로 정결하게 하시고, 성장시켜 깊고 그윽한 영의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리는 생명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치유받은 치유자’로 세워지기 위하여 먼저 치유를 받기 위한 아픔의 광야의 고난을 시간을 걷게도 하십니다. 그런 고통과 시련의 감내 후에라야 진정한 치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이런저런 다양한 높으신 경륜과 뜻으로 때로 우리를 시련과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는데도, 우리는 육신의 한시적인 관점에서 자꾸만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고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도 저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과 뜻을 잘 모릅니다. 오직 그것은 그분, 하나님만이 아실 일입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지만 하나님 당신 안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여 행하시고 이끄시는 모든 삶의 여정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저는 압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고 고될지라도 마침내는 복을 주려 하심을 성경과 경험을 통하여 압니다.


그 사랑을 믿음으로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묵묵히 겸손과 순종으로 걷다보면 우리 모두 어느새 정금 같은 존재기 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랜 세월을 아프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실존적으로 아픕니다. 다소 조금은 더 피로하고 아팠던 며칠의 삶 속에서 비록 모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주님은 당신의 천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저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심”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픈 채 눈 뜬 하루는 당신의 품에 무릎머리를 한 채 저를 안고 계심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써 이러한 영의 일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라고 이렇게 보여주시는 것도 같지만, 눈에 보이던지 아니던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그 품에 안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시련과 아픔도,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시려는 것이던지, 성장시키시려는 것이던지, 사명을 감당하고 하늘의 상급을 위한 것이던지 이유야 다양할 수 있겠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높고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잊지 마십시요. 언제 어디서나 잊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마십시요. 그리고 의심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우리를 정녕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사랑이십니다. 아멘! 할렐루야!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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