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 예배 시간엔 마태복음 10장 40-42절의 말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라는 본문을 나누었습니다.
얼핏 보면 이 말씀은 대접을 잘하라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강해설교집을 눈흘림으로 살펴보아도 대접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기록되어 있더군요. 그런 관점에서도 좋은 말씀을 끌어낼 수 있겠지만, 본문이 진정 전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기도함으로 주님께 감동하심을 간구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우련히 감동하시는 영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본문을 성령의 빛 아래서 조명하니 주님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본문을 보게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귀함이었습니다. 주님의 감동하심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지존자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야 하며, 창조주에 대한 경외를 잃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존귀히 여기는 자를 존귀히 여기며, 멸시하는 자를 또한 멸시하신다. 하나님을 존귀히 여김은 곧 너희에게 생명과 평강을 주리라”
이 음성을 들을 때는 개인적인 경험이 생각났습니다. 저의 경우 많고 많은 찬송과 찬양 가운데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영광의 찬송을 부를 때 심령이 가장 기쁘더군요. 아마 여러분도 그러하시겠지요. 하나님은 높여 드림은 곧 우리의 평강과 기쁨입니다.
나아가 중요한 말씀을 이르시기를, “하지만 너희가 하나님을 존귀히 여겨 높여 드림은, 강압이나 두려움이 아닌 그분을 진정 사랑하는 사랑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것을 기뻐하신다”
연이어 “하나님은 높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너희에게 빛과 생명이 될 것이다. 그분을 존귀히 여김으로 가슴에 품은 사람은 결코 생의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이르셨습니다.
오늘은 본문은 대접이라는 주제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이 진정 전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귀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존귀하시기에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이 존귀한 것이고, 하나님이 존귀하시기에 그분이 세우신 선지자가 존귀한 것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니 중국 대사관 직원이 음주운행의 의혹으로 정차를 당했으나 결코 문을 열지 않았었지요.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강제로 문을 열수도 있겠지만 문을 열지 못한 것은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예우이지요.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를 대접하고 예우로 대하여야 하는 것은, 비록 그 사람이 초라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하여도, 주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뒤에는 주님의 권위가 연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성도, 그리고 성도 상호간에 대한 존중의 의미도 널리 포함하고 있으나, 좁은 의미로는 주께서 그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세우신 영적 지도자에 초점이 있습니다.
본시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 영적 지도자도 부족함과 죄를 안고 살아갑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잘 할 때가 있고 못할 때가 있습니다. 잘할 땐 칭찬하고 그릇되이 행할 땐 종용히 권면할 수 있겠지만, 주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한 예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할 때의 예우를 지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잘하지 못할 때의 예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예우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 때에도 혼적 독 오른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켜서는 안 됩니다. 성령 안의 영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물론 교회나 단체의 영적 지도자가 너무도 그릇되어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행하셨던 거룩한 정의를 배워야 합니다. 마냥 혼적이고 육적인 감정에 휩쓸려 인간의 본성의 악독이 동하여 행동한다면 이는 자신에게도 유익하지 못하며 하나님 앞에서도 옳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모범은 사울왕에 대한 다윗의 태도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사울왕은 그냥 잘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독기를 품고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너무도 잘못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쉽게 사울을 처지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정당하게 해소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는 기름부음 받은 사울왕에 대한 예우를 잃지 않았었지요. 결국 하나님은 사울왕은 스스로 죽음을 당하게 하였고 다윗은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다윗의 지혜와 인내를 배우며, 성령 안에서 행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지도자의 뒤에는 주님의 권위가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하듯 존귀히 여기며, 혹 때로 그릇되이 행할지라도 예우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혹적 독 오른 분노의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 놓아서는 안됩니다. 혼이 아닌 영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이 존귀하시므로 또한 주님 안의 성도 서로를 존귀하게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세우신 직분자들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목회자도 주님이 귀하심으로 그분의 양떼가 귀한 것을 알아 주님께서 그리하셨던 사랑과 섬김으로 성도들을 또한 존귀하게 대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존귀하게 여김입니다.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