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영의 세계를 열어 주셔서 영이신 하나님과 그 세계를 살펴보면서 제가 영이신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 한 가지를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 안에서 행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눅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언약이란 말로써 어떤 약속을 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께서 어떤 대상과 관계를 가질 때 분명하고도 성실한 어떤 관계성을 유지하시길 원하시는 것이지요.
이 의미는 역으로 풀이하면 영이신 하나님의 속성은 언약의 하나님이시요, 항상 어떤 지켜져야 할 약속을 중요하시는 하나님으로써 언약을 어기는 것, 곧 상황에 따라 변하는 속성을 무척 싫어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 이르시기를 서원의 엄중함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지요.
신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신23:22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신23:23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급한 마음으로 말하지 말고 신중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전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또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영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아시기에 우리가 말로써 어떤 것을 정하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이르신 것이지요.
마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왜 하나님은 이처럼 언약을 중요시 하시며, 말의 약속, 곧 말과 마음과 행위의 변함과 변개를 싫어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이라 함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영의 세계의 한 속성은 불변입니다. 영원입니다. 그러나 육의 속성은 항상 가변입니다. 한시적입니다.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원하신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며 언제나 변함이 없이 여상하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이러하시므로 하나님은 어떤 대상을 향하여도 여상하시길 바라시고 그러한 면을 좋아하시지만, 육의 속성인 말과 마음의 변화와 요동과 변함을 무척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제가 주님께 영적으로 깊은 다루심을 받으며 살펴보니, 사람이 육성의 사람에서 영성의 사람으로 성장하여 가면 그 말과 마음과 행동과 감정의 요동이 작아져 갑니다. 말의 변화도 작아져 가며, 행동의 변화도 작아져 가며, 감정의 요동도 작아져 갑니다. 모든 것들이 영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며 고요해져 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성이라 함은 무슨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그러한 것들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실존과 능력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과 영으로 이끄시는 하나의 과정과 수단이며, 영성의 껍질이며 본질은 아닙니다.
영성의 본질은 우리의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자라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에게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면 그 사람이 신령하며 영적으로 바르게 성장한 사람이라 잘못 생각합니다. 신앙상담을 하다보면 어떤 사역자에게 그러한 것들이 나타난다하여 신령한 사역자로 생각하며, 분별없이 맹종하듯 따르다가 어려움을 당한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은사와 능력의 발현과 영적 성장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 능력은 사단도 능히 행함으로 진정성 있는 영분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은사와 능력은 있으되 참된 본질인 마음은 그릇되어서 불법을 행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어렵게 하는 사역자도 많으며, 또한 그릇된 어둠의 영으로 그러한 능력을 행하며 잘못된 사역자도 많습니다. 심판 날에 주님 앞에서 외면당할 사역자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은사와 능력은 영적 성장이나 바른 영성의 다림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은사와 능력은 이적과 표적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심으로 구원으로 이끄시기 원하시는 목적이 그 하나요, 둘째는 이미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심으로 믿음을 성장하게 하고 영적 성장으로 이끄시기 위한 수단으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숙함이나 바르고 맑은 영성의 다림줄은 그 마음과 생각입니다. 그렇게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고 정결하며 고요하고 단정하면, 행동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바 그 삶의 열매도 아름답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함이나 참된 영적 분별의 다림줄은 그 마음과 생각이며, 그 삶과 그 삶의 열매인 것입니다.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원인 마음과 생각은 곧 말로써 표출이 됩니다. 그 마음과 생각이 정결하고 단정하면 말도 그러하며, 그 마음과 생각이 더러우면 그 말도 또한 그러합니다. 곧 마음과 생각은 말로써 표출이 됩니다.
마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마15: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저는 사람을 분별할 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봅니다. 영적 감각이 예민해지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지 않아도 영적 감각으로 우리가 분별이 되어지지만, 확실한 것은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나 지금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심령이 지금 영적인 상태에 있다면 반드시 그 사람의 말도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심령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영적 감각이 예민해져 가면 모든 것들에서 빛과 어둠이 점점 분별이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하는 말도 성령 안에서 진리의 생명의 말이 지금 흘러나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혼적 상태에서 어둠이 묻어 나오는 것인지 알게 됩니다.
혼적 상태에서 어두움이 묻어 나오면 영의 감각으로 보면 입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도나 사람의 됨됨이는 그 마음과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먼저는 말로써 나중은 행위로 표출이 됩니다.
잠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이러한 다림줄로 어떤 사역자나 사람이나 사역지를 분별하게 되면 나름 바른 기준을 가지고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다고 말씀하고 있고, 사람도 자신을 위장할 수는 있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런 다림줄로 살펴보면 그 빛과 어둠의 속성을 나름 바른 기준으로 분별하고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이 성령 안에 있으면 마음과 생각이 거룩하고 정결하며, 그러한 영적 상태에서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흘러나오는 입술의 말은 영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 들으면 생명수가 흘러 들어오듯 그렇게 생명의 소리로 들려옵니다.
영적 감각이 둔하다 하여도 그런 말은 들으면 마음에 빛이 임하고 밝아지고 기분이 함양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영의 빛과 에너지를 머금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육성과 혼성 안에서 어둠을 안고 흘러나오는 말은 영적 감각이 깨어나 들으면 듣기가 몹시 불편하고 힘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 감각이 없다 하여도 말을 하는 자신도 말을 하고 나면 후회를 하거나, 들은 사람도 마음과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개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닌 어둠의 영의 사망을 담은 어둠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연단과 훈련을 받아 영적으로 성숙을 이루어 가게 되면 그 마음과 생각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과 생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 곧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은 성결과 사랑의 양태로 나타나겠지만, 그러한 영적 성향의 속성 중 함께 발현되는 것이 변화가 적은 ‘여상함’, 곧 ‘성실’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육의 속성은 가변이지만 영의 속성은 불변입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를 닮은 영성이 함양되어져 가면 그 사람의 속성도 변화가 적어져 가며, 고요해져 갑니다. 말과 행동과 감정의 요동이 점점 고요해져가고 변화가 적은 여상함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 성장과 함양을 이루어 모두 이러한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의 속성인 불변함을 그 속성이신 하나님이 무척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말과 마음과 행동의 변화와 요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개함을 정말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당신을 향한 언약이나 약속의 변개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우리가 약속이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때로 같은 잣대와 표준으로 심판하시기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불이행과 마음의 변개를 싫어하시는 영의 속성의 같은 눈으로 보시기 때문이요,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성실하지 못한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성실할 수 없기 때문이며, 사람의 속성도 같은바 사람에게 성실하지 못한 자가 하나님께 성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은 사무엘하 21장을 보면 잘 나오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점령하여 갈 때에 기브온 사람들이 지혜를 짜내어 자신들의 생명을 구할 방법을 생각해 내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죽이지 않고 보호하겠다고 약속, 곧 언약을 하였지요. 하지만 사울왕은 민족주의적 열성으로 그들을 전멸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다윗 왕의 시대에 3년 동안 흉년이 들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다윗이 기도하자 하나님은 “이 일은 사울과 그 집안 사람들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범죄한 대가”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일로 말미암아 사울의 후손 일곱 사람이 기브온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서야 하나님은 그 땅에 흉년이 그치게 하셨지요.
이처럼 영이신 하나님은 언약, 곧 약속을 중요하시 하게 여기며 영의 속성인 신실함과 성실함으로 측량하시며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신실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하나님의 다림줄 앞에서 다 실패합니다. 정말 변함이 없는 성실과 여상함을 너무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마음과 말과 행동은 바닷물결처럼 요동합니다.
조석의 변개함으로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발하며 감사와 원망을 발하며, 시시각각의 변개함으로 한 몸으로 진리와 죄악을 행하며 요동합니다.
약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3: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약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이런 우리의 요동치고 변화하는 육의 속성이 영이신 하나님의 속성의 눈에는 너무도 힘겨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뜨겁던지, 아니면 차갑던지 그렇게 여상하고 미지근하여 변화요동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계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조석변개함으로 요동합니다. 저 자신을 살펴보아도 주님의 다루심 안에서 변화가 점점 작아져 가고는 있지만 그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큰 하나의 요인입니다.
하나님은 인자가 아니시므로 일희일비 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래 참으심으로 가만히 살펴보십니다. 그리그 그 마음과 행위의 선과 악의 어떤 분량이 이르면 그 때에서야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손길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실 때에도 오래 참으심으로 가만히 그 여상함과 성실함을 지켜보시며 하나님이 정하신 분정의 인내에 이를 때 축복의 손길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우리는 너무도 요동하며 조석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저해하는 중요한 한 요소입니다.
가령 사람인 우리도 어떤 친구나 연인이 있다면 그다지 자신에게 잘 해 주지 않더라도 여상하고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람이 더 좋지 않습니까. 하루는 너무도 잘 해 주다가 다음 날은 변하여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런 변화가 심한 사람이라면, 잘 대해주는 하루의 마음이 참된 우정과 사랑이라고 느껴지겠습니까. 오히려 더 힘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자가 아니시므로 더욱 큰 여상함과 성실함으로 잣대로 우리를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선조인 요셉과 다윗과 같은 인물은 상황이 어떻게 요동하던 늘 한결같은 여상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신실함으로 보이고 인정하심을 받아 큰 축복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제가 주님께 다루심을 받고 보니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과 신앙의 길을 늘 변함없이 여상히 달려가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결코 끝까지 기다리는 오래 참음과 긴긴 인내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길이 참된 영성의 길 같습니다.
우리의 늘 편안함을 추구하지만 영성의 길에는 항상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를 연단하고 단련하여 더 큰 영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숱한 인고의 시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픔과 고독, 배고픔과 추위 등이 그 속에 본질적으로 있는 것 같습니다. 40년 이스라엘 광야의 시간이 이 사실을 말해 주지 않습니까.
고후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는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춤추며 찬양하다가 그 다음 날에는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하루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히 행하다가 그 다음 날에는 죄악을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그러한 여상하지 못함이 그들 모두를 40여년 광야생활에 머물게 하였고 죽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의 삶에는 근본적으로 성실함과 여사함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조석으로 변하는 그런 마음과 삶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지 못하고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의 세계로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한 요인입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 영육간에 풍성한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영적 성장을 이루어 영성을 함양하여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신실함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 글을 읽으면 아마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해야지 하는 마음을 품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이면 대부분의 마음에서 그러한 마음은 아침의 안개가 사라지듯 사라지고 또 다시 조석으로 요동하는 육성을 따라 살아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조석으로 요동하는 사람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은 시련의 광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을 우리의 육이 아닌 영, 곧 영적 성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가치관과 삶의 목표를 바꾸시고, 여상하고 성실한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복 주시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축복의 손길이지만, 육성을 지닌 우리에게는 무척 힘겨운 일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 어린 삶을 살아가고 싶으시다면, 변함이 적은 신실함과 여상함의 삶을 하나님 앞에 보여 드리십시요.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상황과 일들이 어떻게 펼쳐지던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삶을 끝끝내 보여 드리십시요. 그리하면 다윗과 요셉 같은 복된 사람과 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역을 하며 겪어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을 때 뿐, 또 대부분 요동하는 삶으로 여전히 광야에 머물 것을 알기에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저 자신도 애써야지요.
하나님의 진정성 어린 축복의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러하시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의 변함없는 신실과 성실한 믿음의 삶을 보여 드리십시요. 조석으로 요동하는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실함에서 인정하심을 받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진정 어린 축복의 세계는 열리지 않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지만, 아주 가끔 그렇게 여상한 믿음의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 애쓰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제 눈에도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지만, 성실함을 좋아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의 눈에는 얼마나 귀하게 보일까요?
꼭! 기억하십시요.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신실함과 성실함을 견지하지 못하면 축복의 가나안은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많은 경우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담긴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조석으로 변하는 우리의 육성의 삶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예비 된 하나님의 사랑의 장소는 광야입니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시지만 사람의 성정을 가진 우리에게는 얼마나 고된 장소입니까. 미리 알고 깨달아 신실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복된 생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까닭은 성경의 역사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삼아, 지혜로운 선택을 삶을 살아가라고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영이신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을 가슴 깊이 깨달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늘 여상함과 성실함으로 인정받고 축복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과 영성의 길은 결코 깊은 인내 어림이 없이는 갈 수 없는 인고의 길인 것입니다. 하지만 다가올 영광 앞에서 그 인고는 지극히 경한 것일 뿐이므로, 그 소망과 믿음 안에서 우리는 넉넉히 또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복된 사람이길 손 모아 마음 모아 기도해 봅니다. 샬롬 !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