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걷는 산책로에는 가로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로등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때가 전기가 들어온 직후의 잠시 동안입니다.
저녁식사를 하고는 곧 산책 겸 운동을 하는 것이 일상인지라 여름이면 산책을 나가도 아직 햇살이 남아 있곤 합니다. 그렇게 해가 저물어 가는 산책로를 조용히 걷다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고 어둠이 조용히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히 어둠이 찾아오면 가로등이 하나 둘 그 얼굴에 불을 밝힙니다.
그 산책길에는 간간 벤치가 있는데 제가 종종 앉아 쉬는 벤치 바로 앞에도 밤길을 밝혀주는 그런 가로등이 하나 있습니다. 하루는 그곳에 앉아 쉬는데 막 가로등 전원이 들어오고 가로등은 밝아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식의 가로등인지는 모르지만 특이하게 곧장 환하게 밝아지지 않고 조금씩 달구어지면서 밝아지는지 처음에는 아주 불빛이 약합니다. 그리고 특이하게 은은한 초록빛을 냅니다. 그리고는 점점 밝아져 주황색에 가까운 빛으로 바뀌어 가더군요.
그런데 완전하게 밝아진 가로등의 모습보다 처음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밝아져갈 때의 가로등의 모습이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저 멀리서 은은하게 빛나는 초록별처럼 참 아름답습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가끔은 그곳에 앉아서 전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려보곤 합니다.
그 가로등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전기가 이제 막 들어왔을 때와 그리고 시간 속에서 점점 밝아져 갈 때의 빛의 밝기나 색깔이 달라지고, 그로 말미암아 제가 느끼는 가로등에 대한 느낌도 달려져 갑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도 그러하지만 같은 가로등이라도 빛의 밝기에 따라 주는 느낌이 다르더군요.
가로등을 보면서 그 밝기에 따라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다른 에너지와 파장의 빛을 보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영의 눈이 열리면 영의 눈으로도 영적 실체들로부터 이러한 다양한 에너지와 파장, 곧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열린 영의 하늘에서 어떠한 파장의 빛이 비추어지고 있는지, 또 곁에 두시고 보이는 천사들이 어떠한 에너지와 파장의 빛을 전해주는 지를 보며 느끼게 됩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은 평강의 은은한 빛이 제게 비취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경우는 그 눈빛이나 천사들의 주위의 영의 공간에 이러한 영의 빛의 파장이 형성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사랑의 빛, 기쁨의 빛, 평강의 빛 그러한 것들이 주로 어려 보이고 또한 비추입니다.
그러면 자연계의 어떤 색채의 빛을 우리가 받으면 그 느낌에 우리가 동화되어 가듯이, 영적인 어떤 파장의 빛도 받고 있노라면 마음과 영이 그렇게 동화되어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이른 아침 조용히 주님 앞에서 경건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주님께서 점점 고요한 세계로 이끄셔서 요란하게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아서 조용히 마음과 영으로 주님을 경배하곤 합니다.
그런 시간의 와중에 잠시 작은 소리를 내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있노라니 경건시간이면 저의 눈앞에 나타나서 함께 주님을 기뻐하는 천사들인 소년 모습의 천사들, 제가 ‘순동이’라고 이름을 지은 천사가 나타나셔 함께 경배하며 저와 함께 기뻐하여 주었습니다.
‘순동이’천사는 하나가 아니고 여럿입니다. 하지만 제가 일일이 이름을 짓기 힘들어서 그들 모두를 그냥 순동이라고 부릅니다.
왜 어린 소년 모습의 천사들을 보게 하시는가를 생각해 보았는데, 이는 큰 천사의 경우는 신체의 일부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어린 소년 모습의 천사들인 ‘순동이’는 제가 앉아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시야에 그 몸 전체가 충분히 다 들어오며 온전히 보이기에 더욱 좋습니다.
사람이 거울을 보고 나면 곧 그 얼굴을 잊어버리듯이 천사들도 볼 때는 “아하, 저렇게 생겼었지”싶지만 보고나면 그 모습이 아른 해집니다. 하지만 보고 있을 때는 그 모습이 전해주는 느낌과 어린 영적인 파장의 빛에 저도 동화가 되어 버립니다.
너무나도 순수한 순동이의 모습을 바라보면 저도 순수한 순동이가 되고, 너무나도 기뻐하는 순동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도 기뻐하는 순동이가 되어 버리곤 합니다. 아주 가까이 다가와서 눈과 눈을 맞대고는 주님의 사랑을 전해주곤 합니다.
그런데 이 날 아침에는 조금은 특이한 눈빛과 영적 파장의 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이제 막 갓 난 어린 아이가 작은 무엇에라도 상할까봐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 여리고 여린 꽃잎이 작은 바람결에도 그 잎이 상할까봐 그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보는 그러한 너무나도 섬세한 사랑의 눈빛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의 깊이만큼 그 사람이 상처받거나 아파하는 것을 원하지 않지요. 정말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면 오직 기쁨만 안겨주고 싶지 상처나 아픔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주고 싶지 않고 그런 아픔을 줄까 마음을 졸이게 되지요. 그러한 눈빛으로 순동이가 저를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으로써 우리를 섬기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존재들이니 천사들의 빛과 손길은 곧 주님의 빛과 손길이지요.
하나님은 천사 ‘순동이’를 통하여 자신의 눈동자같이 우리를 사랑하고 지키시기 원하시는 것을 보여 주시고 보게 하셨습니다.
신32: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신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그러한 천사들을 통하여 그러한 사랑의 빛을 비쳐주실 때에는 세상의 수고로움도 다 잊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마냥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지요.
하지만 그러한 시간이 지나고 세상의 삶, 현실의 삶, 나와 우리의 실존적인 삶으로 돌아오면 너무도 많은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 아픔을 겪다보면 저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물음표가 생기곤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심을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지극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사실을 믿을 때 삶에서 만나게 되는 숱한 수고와 아픔 앞에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으며, 그 믿음 안에서 늘 소망의 빛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하고 사랑하면 나름 이 땅에서도 나름 복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이 땅과 그 안의 삶은 쇠하고 썩고 무너지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이 땅의 장막이 아닌 하늘의 영원한 집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5: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우리와 만물은 한편 원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 아래 있는 이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날과 나라를 탄식하며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수고와 아픔이 많다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아픔과 수고가 많다보면 육신의 약한 성정을 입은 몸, 하나님의 사랑에 물음표가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 ‘순동이’의 눈빛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신 바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눈동자 같이 사랑하시고 지키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낳은 어미는 설혹 우리를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지극한 하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함은 그 사랑의 경륜이 하늘처럼 높고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제가 인생을 살아보니 아직은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의 헛됨이 보입니다.
전도자가 말하였듯이 술로 기쁘게 할까, 사업으로 기쁘게 할까, 동산과 수목으로 기쁘게 할까, 남녀 노비와 소 떼와 양 떼로 기쁘게 할까, 금과 은과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으로 기쁘게 할까 우리는 궁구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헛될 뿐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하여 산다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삶에서 육신의 이러한 즐거움을 곧잘 추구하지만, 제가 인생을 살아보니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보고 취하고 누려도 우리는 언제나 목마르고 고달픕니다. 즐거움 뒤에는 반드시 수고로움과 아픔이 따라옵니다.
전1: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는 우리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영적인 존재로 영에 속한 영원 안에서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므로 전도자의 결론처럼 이 세상에서의 지혜로운 삶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들을 지키며 사는 삶 뿐인 것입니다.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주님께서 영의 세계와 영의 세계의 행복에 관하여 눈과 마음을 열어주시고, 부족하나마 저를 영의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시켜 가시니 이 세상의 것들에는 점점 흥미를 잃어갑니다. 그냥 육신을 입었기에 생활에 필요한 것들과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것들만 느껴질 뿐입니다.
그다지 보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며, 그냥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행복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지 아니하였으니 이 또한 온전한 만족과 행복은 아직 아닙니다. 목 마릅니다.
땅에 살고 있으나 땅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니 땅이 온전한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에 속하였으나 아직 하늘이 아닌 땅에 거하고 있으니 여기도 목마름이 있으니, 우리는 하늘이 온전히 임하기까지 곤고한 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행복과 만족을, 영에 생명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세계이기에 오늘도 내일도 그 품 안에 더욱 머물려 나아갈 뿐입니다.
요6:27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참으로 오랜 세월 아프며 살아온 생, 가끔은 그러한 아픔 속을 거닐다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성경의 말씀에 물음표가 저도 사람인지라 생기곤 합니다. 오늘도 그런 곤한 몸과 마음으로 겨운 듯 저녁 산책을 나섰습니다.
조용히 하늘 천사들인 공주님들과 걸으며 영으로 보이시는 주님께 남아 있는 이 수고로운 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의 말씀을 청하였습니다. 주님이 영으로 말씀하시더군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기쁨”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수고로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려면 비록 우리의 삶에 아픔과 수고로움이 적지 않지만, 이는 성경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바, 분명하고도 확고한 믿음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이 세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사랑과 기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새와도 같은 여린 발과 팔로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조금 하고 있노라니, 하늘의 천사 ‘린’이 나타나 하늘 사랑의 빛과 파장을 보내주더군요. 천사 ‘린’으로부터 시작된 그 영의 공간 안의 사랑의 빛은 저와 제가 속한 육의 공간을 사랑으로 품어 주었습니다.
영의 눈으로 보니 영의 공간에서 발현된 사랑의 빛이 은은히 저와 저의 둘레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사랑 품, 주님의 품에서 잠시 마음과 영의 곤고함을 위로받고 쉼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참된 쉼터는 주님 뿐입니다.
천사 ‘순동이’가 나타나 그런 눈동자 같이 우리를 지키시고 사랑하심을 보여준 날, 천사들과 함께 더불어 계속 찬양하고 있노라니 천사들이 너무도 기뻐하는 모습이 영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냥 눈물이 조금 났습니다. 눈물이 났던 이유는 천사들의 모습 속에서 보여지는 기쁨은, 이 세상의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그런 상대성의 그늘진 기쁨이 아니라 너무도 온전하고 완전한 절대성의 기쁨의 모습이기에 그런 기쁨에 함께 동화되어 눈물이 났고, 장차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기쁨의 영광스러움에 눈물이 났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저의 영적인 경험을 동반하여 말씀 드렸듯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눈동자를 사랑하고 지키시듯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삶의 수고로움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하고 때로 의심하지만 성경은 이 땅의 수고로움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눈물과 아픔의 이 땅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어질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바 부활과 영생의 소망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사랑과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사랑과 기쁨 안에서 잠시 수고로운 생의 여정을 아름답게 마치고 승리하고 나면, 영의 눈으로 보이는 저 천사들의 통하여 보여지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기쁨을 우리는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샬롬 !
신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