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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성숙함의 시기입니다.
성숙함의 시기는 이스라엘 출애굽의 여정에 비유하여 보면 오래 그리고 지루한 광야의 훈련과 연단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시기와 가나안 땅의 정복의 시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이 광야에서 죽듯이 진정한 영의 성숙한 단계로 들어가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인데, 첫째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깊은 다루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며 둘째는 세상의 썩을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고 부단히 자신의 영적 성장에 애쓰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자신의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일 것인데, 제가 하나님의 주권을 앞서 기록한 것은 성경과 세상의 일을 제가 가만히 궁구하여 보니, 우리의 노력과 애씀 앞에 선행하는 근원적인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수많은 예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에서와 야곱이지요. 그들은 복중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은 야곱인 것을 말하고 있지요.
창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러므로 사울왕과 다윗왕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그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애굽의 바로와 같이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 주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정말 불행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주권자이시기에 토기장이가 그 그릇을 마음대로 빚는다 하여 아무도 말할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롬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9:23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사랑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기인함이요,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훗날 당신의 공의 안에서 절대 진리의 다림줄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일꾼을 부르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오는 마태복음 20장에 보듯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귀한 그릇으로 빚음을 받은 사람은 늦은 십일 시의 시간에 부름 받았으나 동일한 삯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가운데 받은 자요, 천히 쓸 그릇으로 빚어진 사람은 이른 삼시의 시간에 부름을 받아 이른 아침부터 일하고도 늦게야 일한 사람처럼 동일한 삯을 받은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마20: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마20: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마20: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마20: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20: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하지만 성경을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적인 다루심을 받는 사람들의 생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통과합니다. 요셉이나 다윗이 가장 좋은 예입니다.
요셉은 이미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축복을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혹독하고도 거친 세월의 시간을 통과한 후에야 그 축복의 뜰로 나아가지요. 마찬가지로 다윗왕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왕으로 선택을 받았으나 혹독한 세월의 시간을 왕이 되기 전에 보내지요.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섭리 안에서 극소수가 들어가는 ‘성숙함의 단계’로 나아가는 영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삶에 일반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혹독한 시련과 연단의 광야의 세월을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과 그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안에서 들어가는 사람도 정말 부단한 긴긴 목마름의 눈물과 인내의 노력의 경주 안에서 들어가게 됩니다. 어쩌면 덧없는 육적성장과는 다르게 영적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훗날 영원한 하늘 반열의 생명과 빛의 보화이기에 결코 편법이나 쉽게 되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적 다루심 안에서나 자신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나 이런 ‘장성한 시기’에 들어가는 극소소의 사람은 특징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면에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영혹육의 삶에서 실재가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듯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박았지만 실제 그러한 삶을 이루어가야 하듯이, 새로운 피조물도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나 실제적 피조물이 되기 위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는 옛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나 광야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이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의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옛 사람이 강하여 곤고한 자가 됩니다.
롬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지만 생명의 성령의 법 안으로 참으로 나아가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자신을 발견 하게 됩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정한 ‘생명의 성령의 법’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1세대의 사람이 대부분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옛 사람, 곧 육의 타락한 본성은 어지간해서는 죽지 아니합니다. 죽었나 싶으면 다시 살아나고 죽었나 싶으면 또 살아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지요.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지만 하나님의 훈련학교인 광야에서 혹독한 시련과 연단을 지루하고도 긴긴 세월 속에서 받고 또 받다보면,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게 되면 영은 점점 자라가고, 자신도 마음의 깨달음 속에서 육을 좇는 삶의 헛됨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가령 비유를 들어 설명 드리면 술을 아주 좋아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술이 너무 좋아서 도저히 자신의 의지로는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지만 늘 술을 많이 먹습니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몸에 병이 생기지요. 처음에는 속앓이를 합니다. 그렇게 속이 아프니 잠시 술을 절제하며 치료를 하겠지요. 어쩌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고쳐달라고 기도도 하며 집회 등에도 참여를 하겠지요. 아픔이 있으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그 속에서 영은 조금 자라납니다.
하지만 병이 호전되면 다시금 술취함의 방탕한 세속의 즐거움에 또 빠져듭니다. 그러다보면 다시 더 큰 병이 발병합니다. 또 다시 술을 절제하며 병원 치료도 하며, 하나님 앞에서 매달립니다. 또 치유를 받습니다. 하지만 이미 술에 중독 되어 버린 육신과 마음이라 정말 끊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또 빠져듭니다.
그런 악순환 가운데서 마침내는 ‘사망선고’에 해당하는 질병을 안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절망 앞에 마주서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절대적 절망 앞에 서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시린 눈물, 진물 같은 눈물로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정말 절벽 앞에 선 심정, 곧 죽음을 선고받은 후 인간절망의 벽을 향하여 앉은 히스기야 왕처럼 하나님 앞에 진심과 전심으로 애타게 구원을 간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 본성의 타락함의 뿌리가 어떠한 것을 아시기에 쉽게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긴긴 사망의 골짜기를 거닐게 됩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잔인하리만큼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이 다가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사가 이것을 말하지요.
그 차갑게 불어오는 겨울의 찬 바람 속에서 제대로 옷도 입지 못한 채, 죽음처럼 차가운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울고 또 울고, 그 울음과 눈물마저 메말라 버려가는 가운데, “정말로 세상을 좇는 삶을 헛되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좇는 삶만이 의미요 가치요 행복이구나”를 머리가 아닌 가슴, 마음이 아닌 영혼으로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에 겉 사람인 육신이 죽어 버립니다. 이것이 광야 ·1세대의 죽음입니다.
비록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에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죽기까지 날마다 죽어야 하는 과정은 반복되지만, 광야시기에서 이러한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자신이 나타납니다. 육의 겉사람이 아닌 영의 속사람이 그 생명을 드러냅니다. 육신의 겉 사람이 광야에서 포괄적인 개념에서 죽어버렸기에 영의 속사람이 그 생명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이 ‘광야의 시기’에서 ‘장성함의 시기’로 들어가는 과정에는 놀라운 변혁이 자신의 마음과 영에서 일어납니다. 주 안에서 은혜로 덧입혀진 새사람의 과정에서 이제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러한 삶과 생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자신이 나타나고 발현됩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주인 자리를 하던 육의 겉 사람이 그 자리를 내어주고 영의 속사람이 주인으로 자리 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육성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이제는 영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초기에도 이러한 변화를 순간적으로 경험하지만, 이것은 성령의 강권적인 도우심 안에서 잠시 머무는 현상이지, 자신이 영적 성장을 이루어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아직 어린아이요 젖먹이일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빛과 어둠, 사망과 생명, 죄와 의, 불의와 진리의 삶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자맥질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혹독한 다루심인 광야에서 주권적 섭리나 혹은 자신의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이러한 육의 사람이 죽어버리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마음에 참 깨달음이 자리 잡게 되고 육의 삶의 참혹한 결과를 가슴과 눈물로 알기에 육성이 아닌 영성, 육이 아닌 영을 좇아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가령 덫에 놓인 맛있는 고기를 먹으려다가 다리고 잘리고 몸이 불구가 되는 혹독한 아픔을 겪는 짐승은 아무리 더 맛있는 고기를 갖다놓고 “가서 먹어”라고 아무리 꼬여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지요. 실제로 그러한 삶의 참혹한 결과를 알기에 고개를 온 몸으로 절래절래 흔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속사람의 생명이 나타나게 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전혀 다르게 성격도 변하고 행동도 변하고 친구도 변하고 좋아하는 것도 변하고 다 변합니다. 그리고 육의 속성인 ‘자아’ 곧 자기중심적인 성향도 많이 죽어 버립니다. 곧 자신의 유익을 구하거나 자랑하는 그러한 것들이지요.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요단강 도강이나 여리고 성의 함락에서 엿볼 수 있지요. 옛적 홍해를 건널 때와는 다르게 여호수아의 지시에 아무런 말없이 순종하지요. 이는 광야에서 숱한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장성기에 들어서야 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삶이 걸음마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또한 끝이 아니지요. 아직 가나안 정복이라는 또 쉽지 않은 여정이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적 성장과 순례의 길은 멀고도 먼 험한 길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고 또 그것만큼 보람과 가치와 생명이 남는 걸음이 없기에 힘들어도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신 주님을 따라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내용은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글이 길어서 여기서 멈추었습니다. 뒤의 내용은 기다려 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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