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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글] 돌베개

초록 등불 2014. 1. 7. 17:17

 

  [영성의 글] 돌베개

 

어릴 적에는 부모나 어른들의 사랑 속에서 생은 나름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장성하여 어른이 되어가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생의 수고로움을 알아가게 되듯이 삶과 신앙의 길을 조랑조랑 걸어보면 영성의 길도 그러합니다.


사람은 정말 큰 깨달음 가운데 우리 사람들이 성인의 반열이라고 말하는 정도의 지극히 적은 소수의 큰 성품의 그릇이 되지 못하면, 그 행함의 모든 중심은 이기심입니다. 그러므로 가령 우리가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 섬긴다 말하면서도 실상 그 행함은 대부분 이기심, 곧 자기사랑입니다.


가령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것도 깊이 내면을 고찰해보면 자기 마음의 행복을 위한 것이요, 능력을 구하는 것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주님을 향한 섬김도 자신을 위하여 행함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 마음과 영이 성숙하여 이 땅의 것을 버리고 천국을 침노하여 가는 나름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른 사람도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영원한 상급을 향한 빛의 눈과 마음을 가졌을 뿐이지, 결국은 자신의 상급을 바라며 행하는 것이니 본질은 자기사랑입니다.


정녕 진실로 우리가 주를 사랑하다면 주를 위하여 희생하는 모든 것들이나 시간이 참 기쁨으로 다가오겠지만,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기 사랑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실존적 존재이기에 간간 성령의 감동 속에서 그런 참 사랑의 아카페적인 시간을 어쩌다 거니나 대부분의 행함은 자기중심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본성적 모습을 잘 아시기에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 곧 너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는 극소수의 성인 반열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신10: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신10: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생의 길이던, 신앙의 길이던 걷고 또 걸어가도 점점 곤고한 것을 보게 되고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곤고함의 근저는 우리의 생의 본질과 궁극이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욥5: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이 땅의 시간을 거니는 동안에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힘겨운 진리이지만, 우리는 이 땅에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경험하고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하여 태어나고 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다루심 속에서 우리가 생과 신앙의 길을 걷노라면 우리는 실제적 몇 가지 요인들로 곤고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늘을 참되이 보지 못하고 땅을 보는 눈의 어두움이요, 하나는 하늘을 본다고 하여도 주님을 정녕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사랑의 한계요, 하나는 육신을 입은 사람이면 느낄 수밖에 없는 육신의 곤고함 때문입니다.


가끔은 설교자들이 우리의 생에 소망과 힘을 전해주기 위하여 ‘인생의 행복하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은 양면성이 있듯이 그 말씀은 한편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간간 삶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행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행복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봄날과 기쁨의 날을 거닐기도 합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지만 구속의 ‘이미 그러나 아직’의 시간을 거니는 우리의 삶의 시간과 궁극과 본질은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듯 곤고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과 아픔의 수고로움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섭리인 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의’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곤고한 길을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수고로움이 없으면 심은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수고로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수고로움이 영원한 하늘 보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어릴 적에는 작은 짐을 지게 할 수 밖에 없지만, 자라 장성해가면 점점 더 큰 짐을 지울 수 있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자라감에 따라 수고의 짐을 무게를 더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섭리적 신비 때문인데, 가도 가도 끝없이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곤고한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수고와 짐만을 맡기시면 연약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워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처럼 쓰러져 버리기에 때를 따라서 힘을 주시고 쉼을 주시곤 하지만, 생과 소명의 길의 궁극은 수고로움입니다.


주님을 처음만난 제자들도 처음에는 흥분과 열정으로 가슴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는 주님의 엄청난 능력을 보면서 그 주님으로 인하여 가령 땅의 많은 것들이나 하늘의 능력이나 그런 것들로 인하여 행복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아직 감당하지 못할까 말씀을 삼가시지만 이 땅을 떠나실 날이 가까울수록 제자들을 향하여 당신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길임을 가르쳤습니다. 목숨마저 내어 놓아야 하는 길임을 가르쳤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런 제자들의 제자의 길은 마냥 뛰놀던 송아지에서 묵묵히 땀을 흘리며 말없이 주인을 섬기는 우리가 기르는 소의 성장의 모습에 비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릴 적에 우리 조상들이 소를 키우던 것을 보니 한창 사람과 어미에게 사랑을 받던 송아지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코뚜레를 씌웁니다. 코에 구멍을 뚫어서 이제는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굴레를 씌웁니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제 맘대로 살려고 하면 아프고 아프기만 한 코뚜레 굴레를 씌웁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던 방식에 주인의 굴레대로 살아가야 하는 삶이 답답하고 힘겨워 처음에는 몸부림을 쳐 봅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순응하지 않는 것만큼 자신에게 고통스러울 뿐이라는 것을 배워가면서 점점 고요해져 갑니다. 묵묵해져 갑니다.


그리고 장성해지면 이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오직 주인의 말과 마음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인이 시키는 일을 땀을 흘리며 묵묵히 일하는 것도 배워가고 주인이 주는 꼴에 안식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이것이 소에 비견된 우리의 성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여 갈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벧세메스의 암소처럼 묵묵함과 잠잠함을 배워가게 됩니다.


삼상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삼상6: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삼상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묵묵함과 잠잠함을 배워가게 됨은 비록 생이나 신앙의 여정이 힘겹고 수고롭더라도 받은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기 때문이요,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씨앗의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능히 감당할 수 있고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으면 노래라도 늘 부르려면 그 짐의 수고로움이 그리 녹녹하지 않음으로 또한 묵묵함,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아이 앞에서 생의 힘겨움을 말하지 못하는 아버지처럼, 늙으신 부모 앞에서 삶의 힘겨움을 토로하지 못하는 장성한 자녀처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영적인 성숙의 모습이요, 과정이지요.


저의 지금의 생의 길의 여정도 이러저러한 이유와 깨달음 속에서 말없는 묵묵이가 되어갑니다. 힘겹기 때문에 묵묵이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알아가기에 묵묵이요, 세상의 헛된 것임을 알아가기에 묵묵이가 되어갑니다.


어느 날 그런 묵묵함과 생과 신앙여정의 본질인 수고로움을 안고 저녁 산책을 나섰습니다.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으면 바람이 그리운 새처럼, 어디론가 헤엄치고 싶으면 물이 그리운 물고기처럼 저녁 산책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새가 되어보아도 물고기가 되어보아도 날아갈 곳도 헤엄쳐 갈 곳도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이미 세상에서는 별스런 흥미도 느낄 없게 만들어 버리셔서 그 어디에도 맘과 눈 가는 곳 별로 없지만, 그래도 불빛만은 좋아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상가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사람의 본성상 느껴지는 수고로움 때문에 어떠하면 수고롭지 않을까 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언젠가 시가로 적어본 것처럼, 물질과 권력과 명예와 사랑이 있으면 곤고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잠시 곤고함을 잊게 하는 속이는 것일 뿐 참된 생수는 아니더군요.


요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런 새가 되어보아도 참 행복과 쉼의 날아갈 곳도 없는 마음을 길을 걸으면서 시가로 적어보았습니다. 혼자 걸어가는 외롭고 곤고한 긴 여정이었을 야곱의 돌베개 잠이 생각나 ‘돌베개’라는 제목으로 시가를 적어 보았습니다.


달에게로 가면 / 별에게로 가면 / 참된 평안이 있을까

거리를 한 바퀴 / 맴돌다가 / 다시금 내 자리 / 하늘 문이 열린 곳

하늘 사닥다리가 있는 곳 / 푸른 내 자리로 돌아와

가만 잠이 드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이 기록하고 우리가 경험하고 제가 경험하듯 우리의 생과 신앙의 여정의 본질은 수고로움입니다. 성경의 말씀처럼 이 땅의 어느 곳에도 참된 생명과 쉼과 안식의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들려 올려주실 저 하늘과 그 영광을 바라보며 하늘 사닥다리가 있는 곳, 하늘 문이 열린 곳에서 거룩과 고난의 순례자의 인고의 삶을 살아가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열린 하늘 문을 보며 열린 눈을 가지며 열린 빛을 가지며 생의 여정의 본질을 알아 묵묵히 주님의 날이 이르기까지 거룩과 고난의 순례자의 길을 믿음과 인내로 승리하는 우리면 좋겠습니다. 샬롬 !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창28: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창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출처 및 저작권 :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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