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주님 감동말씀

어떻게 해야 믿음이 자랄까요?

초록 등불 2011. 3. 25. 18:44

 

※ 어떻게 해야 믿음이 자랄까요? ※

 

 


아시다시피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이 우리와 그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이신 것을 믿으며, 그리고 인류의 타락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과 영생 그 모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러한 기독교리의 기본적인 믿음의 고백이 바로 사도신경이지요.


나아가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 말씀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문제의 해결을 받으며, 육체의 질병에서 건짐을 받기도 하고, 또는 믿음으로 약속을 붙잡고 불같은 시험이나 혹은 죽음의 문을 넘어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한 것을 보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어떤 것이지만, 분명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옛날 블레셋 군대에서 골리앗이라는 신장이 여섯 규빗 한 뼘이나 거구장신의 용사가 나와서 싸움을 걸어올 때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아무도 그를 맞상대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소년에 불과했던 다윗은,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큰 믿음이 있었기에 물맷돌로 골리앗을 쳐 쓰러뜨린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의 실체, 그 분량에는 다 차이가 있으며, 그 실체는 환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잘 느끼고 아시겠지만 우리는 실상 믿노라 하면서도,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면 입술의 고백일 뿐, 실상 잘 믿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정작 믿을진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것들은 지식으로만 쌓아둘 뿐 우리의 상식과 이성을 더 많이 좇아 살아갑니다.


가령 예를 들면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는데, 정말 그 말씀을 믿는다면 물질의 복은 누구나 원하는 법, 너도 나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려고 어쩌면 법석일텐데, 우리의 이성과 상식은 왠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아깝고 그러한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여 잘 드리지 못할 때도 많지요.


손을 얹어 믿음으로 기도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실상 교회에서 그러한 일을 진행해보는 교회조차도 그리 많지 없지요. 우리는 실상 믿는다고 고백하고 아멘!으로 화답하지만, 부활과 영생까지도 때로는 믿음이 아닌 지식이나 관념이요, 아니면 기대요, 아니면 마음의 위로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삶을 살아가다가 어려운 일이나 힘든 일을 당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희생 안에서 영생을 주신 소망과 그 빛은 다 잃어버리고, 낙심하고 때로는 원망하다가 가끔은 믿음에서 실족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믿음은 우리의 생활에서 기도만큼, 아니 어쩌면 더 선행적인 중요성을 띠는 것이겠지요.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기도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고 커져갈까요?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안에서 주님이 감동하신 4가지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 두 정탐 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지금까지 이적을 베푸시고 인도해오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들은 우리의 밥”에 불과했지만, 나머지 10명은 하나님 대신 그들의 기골의 장대함을 바라보고는 우리는 그들의 상대도 안 된다며 낙담하였습니다.


다른 예로 가령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재산이 반 토막이 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잃어버린 반 토막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며 낙망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남은 반 토막을 바라보며 소망을 갖습니다.


믿음이 곧 긍정적인 사고는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대부분 긍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의 근거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물 위로 걸어 예수님께로 가던 베드로, 그가 주님을 바라볼 때는 능히 넘실거리는 풍랑의 바다 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갔었지요. 그러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 능력의 주님이 아닌 불어오는 바람과 풍랑을 바라볼 때는 그만 실족하여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이르렀을 때, 앞에는 시퍼런 홍해바다요, 뒤에는 자신들을 죽이려는 애굽의 최정예 부대가 칼과 병거로 달려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 곧 애굽에서 엄청난 이적과 기적의 10가지 재앙을 행하시던 하나님을 조금만 생각하고 추억하며 바라보았다면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앞의 시퍼런 바닷물과 뒤의 병거들만을 바라볼 때 두려움과 낙심과 절망에 빠졌던 것입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는 모세의 말처럼 가만히 하나님의 행하실 구원을 믿음으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라면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떠한 환경이나 시간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려면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그것은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둘째, 말씀을 늘 읽고 들으며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하였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무엇을 보고 듣고 읽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가려 보고, 가려 들으며, 가려 읽어야 합니다.


우리의 혼도 의식이 있어서 어떤 것은 보기 좋아하고 어떤 것은 보기 싫어하지요. 가령 더럽고 추한 것들이 보이면 우리는 눈살을 찌푸리지요.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고 살아있는 영은 어떤 것에는 기뻐하나 어떤 것에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이전에는 즐겨하던 세상의 것들이 영의 자라고 성장할수록 거부감으로 다가옵니다. 이전에는 하고나면 즐거웠는데 영이 자라면 하고나면 오히려 공허하고 괴롭습니다.


영은 자라갈수록 기도와 말씀과 찬양과 예배의 경건한 시간을 사모하고 그곳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찾습니다. 영적 깊이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수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텔레비전이나 즐기던 오락들이 왠지 거부감으로, 그 시간을 차라리 경건시간으로 갖기를 원하는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것을 향해서는 영이 웃지만 어떤 것을 향해서는 찌푸리고 거부감을 느낍니다. 영적 세계로 깊이 들어갈수록 세밀해지고 깊어집니다. 이러한 현상이 없다면 지금 영이 잠들었거나 죽어 있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러므로 믿음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는 로마서 10장 17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며 또한 감동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우리의 상식이나 이성이나 지식에 반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혼적 상식이나 이성이나 지식과 같다면 굳이 믿으려고 하지 않아도 믿어지지요.


그런데 동정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말씀하며,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었다고 말씀하며,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았다고 말씀을 하니, 우리의 이성과 지성과 상식은 “허 그것 참!”뒤로 벌러덩 눕지요.


이처럼 믿음의 세계는 우리의 상식이나 지식이나 이성과 반하는 세계이므로,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읽고 보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음성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금세 흔들리고 마는 것입니다.


영혼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이니 죽으면 끝나는 것 같고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죽음의 위기 앞에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한 제자들과 특히 도마, 그리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임하신 성령. 그러한 성경의 말씀을 매일 읽고 묵상하며 말씀 속에 젖어 살아갈 때 우리는 죽음의 앞에서도,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나도 너희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주기철 목사님처럼 일사각오의 신앙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보는 것도 가려서 해야 하고, 듣는 것도 가려서 해야 하고, 읽는 것도 가려서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표준은 성경과 그리고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셋째, 조금씩 믿음으로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처음부터 큰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믿음의 은사와 같은 것을 통하여 기적적으로 큰 믿음을 가지게 할 수 있겠지만, 믿음도 조금씩 자라가고 성장하는 것이겠지요.


조용기 목사님의 책을 보면 재미난 말씀이 있더군요. 정확한 기록은 생각나지 않는대 대략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처음에 사역하는데 자꾸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등등의 심상인지 환상인지가 자꾸 보이더랍니다. 너무 자꾸 보여서 괴로워서 마귀의 장난인 줄 알고 예수 이름으로 쫓아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주님께서 이르시는 말씀이, “그러한 것이 보일 때 네가 믿음으로 선포해라. 그래야 역사가 일어나고 그렇게 될 것이다”그러시더래요.


“성경을 보아라. 태초에 흑암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할 때, 빛이 있으라고 성부 하나님이 선포할 때 빛이 생겼듯이, 네가 믿음으로 선포해야 역사가 일어난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더래요.


그래도 조 목사님의 생각에, 앉은뱅이더러 나았으니 일어나라고 했는데, 못 일어나면 얼마나 창피할 것인지 생각하니 못하시겠더래요. 그래서 아주 쉬운 것부터 했다고 하더군요.


두통 환자가 낫는 것이 보이면, 믿음 반 약간의 두려움 반으로 “여기 두통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주님이 나았다고 합니다”라고 선포를 하였답니다. 그랬더니 정말 낫더라는 거예요.


말 많은 사람들, 세상사람 중에 누군들 허물을 털자면 없는 사람 누구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조목사님의 어떠한 부분들을 힐난하지만, 제 생각엔 정말로 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남을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시지요. 한편 우리나라의 기독교계의 자랑이요, 세계적인 하나님의 종인 조목사님도 믿음의 세계에서 그처럼 어린아이 같은 걸음을 걸으시며서 자란 것이더군요.


저도 이번에 건강이 많이 악화되기까지는 신유며 축사 그러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있는데 관심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정통적인 우리의 교회의 사역이 그러한 것에 젖어 있어 그러한 문화 속에서 자란 탓도 있고, 또 한편 은사 등이 다분히 문제도 많이 발생시켜 조금은 도외시는 되는 경향, 그리고 어쨌거나 개인적으로 그다지 그러한 것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족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악화되고 보니 우선은 제가 낫고 싶은 열망이 생기고, 나아가서는 이처럼 육체적으로 아픈, 혹은 사단에게 매여 고생하는 성도들을 주의 능력으로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저의 아픔을 통하여 도리어 선한 욕심과 마음이 생기더군요.


나아가 성경을 읽어보면 분명히 주님께서 복음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시고 사단에게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고, 나아가 훗날 우리들을 향하여도 동일한 명령을 분명하셨지요.


막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그래서 앞에서도 말씀드린 이유로 치유와 능력행함 등 다양한 성령의 은사와 권능에도 새롭게 관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치유에 관한 책들도 사서 읽어보곤 하였지요.


얼마 전에 어머님께서 다녀가셨는데 오실 때 속앓이, 이질 비슷한 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한번 아프시면 오래 고생도 하시고 하셔서 아주 어머님이 걱정을 하시는 병증인데, 저도 성경적인 원리에 따라 믿음으로 손을 얹고 기도를 하였지요.


목회자가 병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를 처음 해 본다는 것이 우습지만, 이전에는 앞에서 말씀드린 이유로 별스레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정통적인 지금의 보통의 교회의 모습을 따라 그냥 말씀만 전하는 목회만을 주로 하였으니까요.


물론 이전에 가끔 누군가를 병문안 가서 기도를 해보기도 하였지만, 잘 알다시피 관례용 기도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기도였습니다.


그러한 관례적이고 형식적인 기도가 아닌, 믿음으로 하는 기도, 처음으로 해 보려니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고 그렇더군요. 대충 흉내만 내고 기도를 마치니, 속의 성령께서 - 내적 증거라고 합니다 - “안 나았다. 여유와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하여라. 권세와 권위를 가지고 선포하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순종하는 마음으로 “어머니, 병이 안 나았대요. 다시 기도합니다”라고 방으로 들어가신 어머님을 따라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었습니다.


다음에 논하겠지만 병을 위한 치유기도나 문제해결의 기도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선포가 중요합니다. 마음과 영으로 주님께 약간의 기도를 드린 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증이 나을 것을 선포하였더니, 나았다는 내적 증거가 제게 오더군요. 어머님도 스스로 내적증거를 받아서 나은 것 같다고 하시구요. 어쨌거나 큰 병증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머님의 속앓이는 치유 받고 시골로 가셨습니다.


성경은 누군가가 아프면 믿음으로 손을 얹으면 나으리라 말씀하지만, 실상 우리는 시도조차 거의 해보지 않으며 살아갑니다. 무조건 병원부터 찾고 봅니다. 병원을 찾는 것이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먼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손을 얹고, 혹은 말씀대로 장로 곧 교회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러한 병든 자를 위한 기도나, 혹은 십일조나 구제나, 우리의 이성과 지식과 상식에 반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씩 믿음으로 실천해 보다보면, 경험이 쌓여가고 그러한 가운데 “아!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구나”라는 것을 실감하면 조금씩 더 우리의 믿음이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측면에서 조금씩 믿음으로 실천해 보시길 원하셨습니다.


넷째, 마지막으로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 한편 우리의 결단과 의지가 필요하다 이르셨습니다.


사역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면 능력 사역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담대함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그러한 믿음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풍랑이는 바다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가던 베드로가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은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배를 타고 있어도 죽을 것 같은 풍랑이 일렁이는 바다, 주님은 저만치 걸어오는데,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주님께서 “오라!”할 때, 과연 저와 여러분은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 발을 한 발자국이라도 내디딜 수 있겠습니까?


비록 중간에 믿음이 흔들려 빠졌지만, 다른 제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물 위를 걷는 경험을 베드로는 한 것이지요. 베드로의 믿음은 여간이 아닌 것입니다.


실상 우리에게 얼마만한 믿음이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 스스로 내면을 가만히 헤아려 보면 참으로 믿음이 없는 자신의 모습에 새롭게 놀랄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생명과 직결 된 어떤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주님이 내가 지켜주고 고쳐 줄터이니 “끊으라”말씀하시면 즉시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별로 없으실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음성인지 분별이 중요하겠지만 실상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신다 하여도 누구나 두려워하는 죽음, 믿음과 담대함이 없이는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는 설령 이삭이 타서 재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이삭을 살려내실 분임을 믿었으니까요.


이처럼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는 주님은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은 믿기 어려워도, 마음이 힘들어도, 흔들려도 의지와 결단으로 “믿습니다”라고 순종하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하다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함이 필요하다 말씀하셨습니다.


믿음만큼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도 없고, 듣는 말도 없고, 또 어떤 측면에서 막연한 말도 없지만, 실상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실체이며 정도와 깊이의 차이가 신자들마다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는 드러나 보이지 않으나 어떤 문제 앞에서, 역경 앞에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우리의 신앙세계에 있어서 믿음은 너무도 소중한 보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쉽게 얻어지거나 자라거나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아이가 귀신이 들려서 자주 불과 물에 던져지고 때로 거꾸려져 거꿈을 흘리고 파리한 모습 앞에서, 아버지는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


우리는 이 아버지의 모습이 믿음이 없다 말할지 모르지만, 상식과 이성으로 귀신이 들려서 불에도 들어가고 물에도 들어가고 엎드려져서 거품도 흘리고 그러한 아들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고침 받는다는 것이 쉽사리 믿어지는 일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지요. 그 때 아버지는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어쩌면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이 아버지가 주님을 향해서 외쳤던 그 절규의 소리가 아닐까요? “주님, 내가 믿나이다. 믿기를 원하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엄청난 신유의 기적, 팔 하나가 어릴 적부터 불구라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한 사람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팔은 자라 정상적으로 될지어다”라고 선포하자 사람들과 의사들도 놀라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팔이 쑤욱 자라 한쪽팔과 같이 되게 하는 등의 놀라운 신유의 기적을 일으켰던 프랜시스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더군요.


“여러분에게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바람을 가르는 맹호처럼 달려가 선포하고 행하십시요!”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님이 가르치신 믿음이 성장하는 법을 통하여, 지금은 비록 겨자씨만큼도 되지 않는 믿음일지라도, 정말 하나님과 그 말씀을 아이처럼 단순하고 온전하게 믿었던 프랜시스 여사와 또 세상이 능히 감당하지 못했던 뭇 믿음의 선조들 같은 장성한 분량의 큰 믿음이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며 기원해 봅니다. 아멘!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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