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집회 (2014년 9월 27일)는 어쩌면 제가 쉬어 가고 싶었습니다. 나름 일정의 주기를 가지고 진행되는 집회라 공지를 올렸지만 최근 다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피곤함에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처럼 조금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의 마음은 양으로 음으로 전해져서 참여하신다는 분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많지 않았습니다. 양으로 전해진다 함은 제 마음의 심연이 그러하니 실제로는 마음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글자인 안내글 등에 감화를 이끌어내는 하늘 불이 담기지 않았겠지요.
음으로 전해진다 함은 마음은 물질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의 차원의 속성이 있음으로 제 마음의 그러한 상태가 과학적으로 표현하면 파장으로 무의식 중에 전달이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영이라 직접 만나고 말을 나누지 않아도 시공을 초월하여 다 서로에게 전달이 오가며 우리 마음의 깊은 심층과 영은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다만 겉의식인 표면의식이 맑고 밝지 못하여 그것을 잘 감지해내지 못하니 명료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나 영성이 개발되어져 가고 영의 기능이 활성화되며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여 가면 그러한 것들을 점점 명료하게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 감각이 깨어나면 날수록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남이 듣지 않는다하여 함부로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실제적으로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람은 영이라 곁에 없어도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의 파장만으로도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남이 듣지 않는 말은 없습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다 알아차림이며 실제로 우리가 육체를 떠나 영의 세계의 차원으로 들어간다면 저의 경험상 그곳에는 꼭 말이 필요 없는 곳일 것입니다. 말을 나눌 수도 있겠지만 마음과 마음으로 교감이 가능한 곳일 것입니다. 천사들과 영들과는 지금도 그렇게 교감하고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저의 다소의 피로함에 쉬어가고 싶은 마음과 참여 정도의 적음 등으로 사실은 집회 당일 새벽까지 진행여부를 놓고 마음의 갈등을 가졌습니다.
그런 시간의 흐름의 와중에 한번은 집회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사람의 손에 알밤이 몇 알이 들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름 의미를 짐작하였지만 영으로 오는 것들엔 오류도 많기에 그다지 큰 의미는 두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공식적인 집회 모임이고 공지가 올려졌고 또 주님의 뜻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되어서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수차례 주님의 뜻을 확인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문자 몇 통이면 집회 모임을 연기하거나 취소할 수 있어 가능한 시간까지 진중하게 주님 안에서 생각하며 주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앞에서도 기록하였듯이 저는 개인적으로 다소 피로하여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주님이 “한 번 쉬어 가거라” 그런 대답을 내심 기대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으로 주님께 나아가니 주님의 말씀은 쉬어가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영으로 오는 것은 대부분 느낌과 생각이라 오류도 있기에 수차례 확인을 하였지만 여전히 주님은 쉬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곁의 천사들에게 물어보며 확인을 하여도 역시 주님처럼 집회를 진행하기를 눈빛으로 전해주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여호와의 등불인 저의 영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내적증거를 가진 저의 영혼에게 물어보아도 쉬지 말고 집회를 하라고 전해주었습니다.
잠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여 어떻게 하면 잘 알 수 있느냐고 물어오시는데, 어떤 경우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뜻은 참 알기도 쉽지만 어떤 경우와 의미에서는 참 알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조언이나 예언의 권면을 듣고 참고하는 것은 좋지만 최종의 결정은 자신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음성, 여호와의 등불인 자신의 영혼을 통하여 증거하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스스로 받고 확정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으로 오는 음성과 신호를 사람이 포착하는데는 실수도 있으며 정확하게 이해하는 점에도 문제가 있으므로 타인의 예언 등을 듣고 무분별하게 계속 따르면 반드시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도 분별하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영으로 오는 음성이나 신호가 항상 정확하다면 분변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지요? 오류가 있고 잘못 듣고 포착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듣는 많은 다른 이들은 분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과 뜻의 확인의 과정에는 분별이라는 과정이 필수이며 그 최후의 분별은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 하나님의 영이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러하며 자신의 생은 자신이 책임지고 결정짓고 나아가는 주체성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정이 어려운 문제일수록 많은 자료들과 지식들과 환경의 여건과 하나님의 뜻을 심도 있게 살피는 다양한 노력은 필요하지만 그래도 결정은 자신이 성령의 내적 증거 안에서 스스로 얻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어리고 지식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가령 예언자라 하는 사람들이 무슨 대단한 신령한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읽어낸다고 오해를 하시고 신령한 사람인 듯 대하며 맹종하는 경향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 스스로도 하나님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하는 사역자로서의 고민과 고뇌도 많으며, 하나님이 선연하게 역사하여 주시지 않는 상황과 문제는 그분들도 모릅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읽는다면 그들의 삶은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분들도 자신의 문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고민하는 부분들도 많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과 음성과 영의 신호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때가 간간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도 먼저는 예언자가, 그리고 둘째는 듣는 피상담자가 분변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과 지혜와 권면의 말을 참고를 하는 것은 좋으나 어디까지나 결정은 자신 속에 내주하시는 자신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따라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나아감이 정도입니다.
어쨌거나 다양한 방법과 각도로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살피니 피곤하여 쉬고 싶은데 집회를 인도하라고 말씀하시니 주님께 제가 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 피곤합니다. 그리고 외롭습니다”
주님께 아뢴 외롭다는 말의 뜻은 저도 저 자신의 생의 무게도 감당을 잘 하지 못하는 힘겨운 연약한 사람일 뿐인데 그래도 사역자라고 늘 기대어만 오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힘겨움을 위로하며 감내하기가 쉽지 않다는 솔직한 사람으로서의 고백이었습니다.
목회자로 살아보면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지만 목회자는 사람을 위로하는 자리이지 의지하고 기대는 자리가 아니기에 그런 고독감이 조금 더 있는 것도 같습니다. 마음에 연약함이 있어도 주님 밖에 말할 곳이 없습니다.
주님도 간단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그러하였다”
주님의 그 말씀에 성경속에서 보여지는 주님의 모습들이 지나갔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시던 그 말씀, 그리고 십자가를 앞둔 절대절명의 어둠 속에서 모두 다 자신을 버리고 홀로 남겨진 주님의 모습들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마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막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런 주님의 말씀과 떠오르는 생각에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한 번 여쭈어 보았습니다.
“오늘은 사람도 몇 분 오시지 않는데 그래도 집회를 인도하여야 하는지요?”
그 때 주님이 제게 정신이 들게 하고 깨달음을 주는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의 눈은 하늘의 영광을 구하느냐? 아니면 사람의 영광을 구하느냐?”
주님의 그 한 마디 말씀은 순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을 두고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가령 목사님들의 경우 큰 대형교회의 사역지와 저 먼먼 초라한 사람도 몇 없는 섬의 사역지를 놓고 생각할 때 대부분 큰 대형교회의 사역지를 선택하려 합니다. 이는 그곳에 부요와 명성과 안락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저 먼먼 초라한 섬의 작은 영혼을 위하여 주님이 그곳에 가길 원하시면 그곳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이요, 순종입니다.
큰 대형 교회를 선호하는 것이 그 눈이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면,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 외진 곳이라도 주님이 명하시면 순종하는 그 길이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길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의 눈과 뜻에 합당한 삶을 걷는 것이 옳으냐,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며 걷는 것이 옳으냐?” 주님은 제게 그 질문을 던지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물음 속에서 제게 작은 순종의 훈련의 섭리가 있음과 그리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눈을 의식하는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요청하는 선하신 뜻이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고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집회를 인도하다보니 집회를 두고 기도하는 와중에 주님이 환상으로 손 안에 보여주신 그 알밤의 숫자만큼 꼭 참석을 하셨더군요. 그곳에서도 한 깨달음이 왔습니다.
때로 사람이 많을 때나 때로 사람이 적을 때나 때로 한 사람이 설령 온다할지라도 이곳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다보면 다양한 분들을 위한 다양한 측면의 메시지가 나아가야 하고 개인적인 기도와 관심도 적을 수도 있는 바, 환상 가운데 보여주신 대로 오늘의 집회는 이분들만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요, 시간표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참된 신앙생활이란 주님이 말씀하신 그냥 단순히 순종하면 되는 것인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섞어 늘 어렵게 만드는 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주님의 질문과 음성과 깨달음 가운데 저와 우리 자신의 많은 모습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면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 대부분 자신의 유익이나 사람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실상인 것 같습니다.
진정한 영적인 사랑으로 주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육적인 정과 관계와 인정을 바라는 마음, 곧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깨달은 눈이 아닌 땅의 썩을 영광을 구하는 어둡고 어리석은 눈과 마음으로 행하는 저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영적인 행복과 생명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얼마 전 천사가 제게 ‘영적인 사랑’이라고 의미를 설명하며 생일 선물로 전해준 홍보석 목걸이처럼 하늘의 영광을 진정으로 구하는 영적인 사랑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육적인 정과 관계와 사람의 인정을 바라는 마음 속에서 움직이며 땅의 영광을 바라는 것이 한 큰 이유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지금 어린 아이와 같지만 진정한 영적인 홍보석 사랑의 길은 참 외로운 길인 것 같습니다. 문도 좁고 길도 좁아 찾는 이가 적은 길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은 멀리해야 하는 광야의 삶인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으로 알아가는 바 비록 육적으로 곤고하나 이 길에 주님이 말씀하신바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습니다. 육신과 육정과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길의 결국은 곤고와 허무 뿐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통하여 함께 작게나마 생각하고 깨달아 가며 땅의 썩을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늘의 영광을 구하며, 영적인 아름다운 홍보석 사랑으로 빚어져가고 익어가 주님이 그 생명의 피 흘림으로 열어주신 하늘의 진정한 생명수와 빛과 사랑과 행복을 가득 누리며 살아가는 참된 생이요, 참으로 복된 생을 살아가는 우리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의 영광을 구하며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땅의 영광을 구하며 살고 있을까요. 성경이 말씀하시는 빛의 눈이 구하는 영광은 하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구할 영광은 하늘의 영광입니다. 샬롬
요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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