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수필

사랑의 고백 - 주님과의 구체적이고 친밀한 교제

초록 등불 2011. 3. 30. 15:51

 

  사랑의 고백


언젠가 이런 신앙적인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중의 나는 새를 먹이시지 가만히 둥지에 앉아 있는 새는 먹이시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적힌 신앙의 글이었느냐 하면, 공중의 새와 들의 풀도 먹이고 입히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지만, 마냥 게으르고 앉아있는 자세는 아니된다는 의미의 말씀이었지요. 잠언서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있지요.


잠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만약 건강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자신도 애쓰며 노력해야 합니다. 공부나 사업이나 그 모든 것들이 마찬가지이겠지요. 기도도 중요하지만, 사업가가 사업에 축복해 주시길 기도하면 자신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고 애써야지 가만히 게으르게 누워있으면 되겠는지요? 그리고 제대로 된 기도는 반드시 열정을 한편 가져오지요.


저도 개인적인 지금의 사정으로는 교회담임과 같은 현실목회가 어렵다면, 이 일이라도 확장시키고 열심히 해야 하겠기에, 나름 애쓰며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저 먼먼 선교현장에 나가서 피와 땀을 흘리시는 분들의 수고에 비하면, 사역이라는 말조차도 무겁고 부끄럽게 느껴지지만, 무거의 의미의 사역이라는 의미를 떠나서 소극적 의미에서 둥지의 새가 아닌 공중의 나를 새를 공궤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제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 부모님이나 자녀를 위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수고의 열매를 안겨 주실 것이니까요.


그래서 어제도 종일 이곳저곳을 손질하며 종일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작년 처음 아플 때에 비하면 나름 회복시켜 주셔서 이만큼이라도 일할 수 있게 하시니 너무 감사하고, 또 입술의 고백과 믿음대로 온전히 회복시켜 주실 것도 심령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제 생의 길과 삶이 어떠하던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신 하나님께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를 부를 뿐입니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뿐입니다. 제가 가진 한 가지 소원은 마지막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에 있는 힘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고 하늘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선한 소원이니 그렇게 해 주시리라 또한 심령으로 믿습니다.


매일 일정한 분량의 일을 하고 조금은 여유롭게 경건의 시간도 가지고 하는데, 어제는 이곳저곳 손질해야 할 곳들을 다 손질하느라고 간간 누웠다 쉬고 하면서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을 쉬었지요.


저녁을 먹고 운동 겸 산책을 조금 여유롭게 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쉬려고 누우니 밤 10시, 습관대로 몸의 경혈과 손에 약간의 자침을 하고 경건의 시간을 다소 갖지 못하여 누워서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거듭거듭 말씀드리지만,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십시요.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하셨거나 제대로 된 방언의 은사를 경험해보지 못하신 분들이 그 은사의 영적인 능력이나 작용에 대해서 잘 몰라서 가끔 의문표를 가지시곤 하시지만, 정말 방언의 은사가 제대로 열리면 신앙생활에 이만큼 자신에게 유용한 은사가 없습니다.


솔직히 목회자로써 조금은 부끄럽지만, 저는 요즘 울적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지만, 역으로 말하면 떡도 필요한데, 지금의 처한 상황에서는 제겐 세상적인 즐거움이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광야 한 가운데서 홀로 주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는 언제나 기뻐하지만,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오면 가끔 울적한 마음이 찾아야 마음을 조금 힘들게 하곤 합니다. 어제 저녁에도 다소 울적하더군요. 하지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방언기도를 많이 하라는 말씀을 자꾸 드리는 이유는 제가 경험해 온 바도 그렇고, 영적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도 다 방언기도를 한편 열심히 하신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은사의 비밀을 다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자신의 신앙을 함양하는데 그만한 영적인 무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누군가 방언이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시동키라는 글을 쓴 것을 본적이 있는데, 맞습니다. 방언기도를 시작하면 저의 경우 대부분 곧장 영의 세계로 의식이 들어가 버립니다. 영적의식 세계란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시고 다스리는 세계, 한편 하나님의 나라라고도 볼 수 있는데,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의와 희락과 평강! 그 세계 속으로 심령이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세상이 아닌 하늘로부터 평강과 기쁨이 임하지요. 전 그렇게 매일의 힘든 상황을 하늘로부터 임하고 주시는 은혜로써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매일 주님의 말씀과 위로 속에서 하루하루를 이겨가고 있습니다.


방언기도를 하면 주님과 교통을 하기 때문에 일방적인 기도는 거의 없습니다. 때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지시를 듣고 때로는 저의 간구를 드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제는 종일 일한다고 다소 주님을 잊고 있었더니 기도를 시작하니 대뜸 주님께서 “사랑을 고백하라”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즈음에서 뭔가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적어둘 필요가 있는 듯하여, 아들을 불러서 펜과 종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손에도 자침한 불편한 상태라 흘림체의 초서체처럼 받아서 적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를 계속 드렸습니다. 영으로 주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진정과 진심으로 당신을 향하여 사랑의 고백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성령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는 그런 일반적인 표현 외에 아주 구체적이고 더 세밀한 고백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랑의 고백들로 조금은 세밀하게 사랑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주님, 당신이 제 생에 가장 소중한 분이십니다. 당신께서 내 삶의 목적과 이유가 되길 원합니다.” 등등의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세밀하고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가끔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저 멀리 계신 관념적인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영적인 세계를 마치 꿈과 같은 몽상의 세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도 실체입니다. 영적으로 더 깊이 체험을 하신 분들은 이 세상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세계라고들 말씀하시더군요.


언젠가 “주님의 웃음소리”라는 영성 수필글을 쓴 기억이 나는데,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가족들끼리 기뻐하니, 영으로 함께 기뻐하시는 주님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더군요. 너무도 포근하고 온 우주를 감싸는 듯한 웃음소리에 취해서 한동안 가만히 듣고 있었지요.


이처럼 영의 세계는 몽상이나 환상이나 꿈의 세계가 아닙니다. 가끔 영의 귀나 눈이나 감각을 열어주시면, 이것이 다른 표현으로 영안이 열린다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특별한 주님의 은혜로 그런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곤하지요. 영적인 세계는 분명 존재하는 실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문을 열지 않고도 빛처럼 들어오시기도 하였지만, 고기도 잡수시고 하신 것처럼,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 하신 것처럼, 영적인 세계도 차원이 다를 뿐 실체의 세계입니다.


가끔 이런 이야기나 글들을 보면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우리의 모든 판단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의 실체를 제자들도 보았고 옥중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난 이야기도 분명 나오잖아요. 그러니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고 이성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성경을 떠나서 잘못된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자신이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근거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주님과의 사귐과 교제도 실제적인 것인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다가 혹여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랑의 고백을 늘 듣고 싶어하지요. 매일 아니 매 시간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하지요. 그래서 “나 사랑해?”라고 너무도 자주 묻곤 하지요.


그리고 “그래 사랑해..”라고 말하면, “아니 그렇게 말고, 어떻게 사랑하는지 말로 풀어서 설명해봐”라고도 요청을 하기도 하지요.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넌 내게 소중하고, 모든 것들을 합친 것보다 내게 귀하고, 내 생명보다 더 널 사랑해..”등으로 우리는 표현을 하고, 서로 주고받으면서 사랑의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요. 주님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기도의 경험에서 더욱 그러한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께 무엇을 해 달라거나 간구하는 한편 어린아이와 같은 낮은 수준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에는 주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의 고백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에게 “늘 무엇을 해달라고 조르기만 하고 징징대면..” 자녀이니까 밉지는 않겠지만, 자녀이기에 대부분 들어주겠지만, “아빠, 엄마 사랑해요, 감사해요”라고 고백을 자주 하면 듣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기쁩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엔 간구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과 감사의 표현도 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경배와 영광을 돌림입니다. 어제 밤 사랑의 고백을 하라 감동하시던 성령님은, 그 다음엔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와 영광을 돌리라는 감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고백 이외에 경배와 영광을 돌려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감동하심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편 창조주시요, 주권자이신 오직 홀로 높으신 가히 이르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지존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고백과 함께 영광과 경배도 늘 우리의 삶에, 기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소 혼적으로 울적해하던 마음을 보셨는지 주님께서 제게 요구하신 것이 “기뻐하라”이었습니다. “기뻐다”라고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주님 안에서 주신 소망과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바라보며 말씀 안에서 기뻐합니다. 주님 고맙습니다”라는 고백도 드렸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초기 예배를 드리던 시간, 주님은 예배 시간에 “일보다 섬김보다 먼저 내 앞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나더군요. 언젠가 말씀으로 보내드린 기억이 납니다. 부모가 자녀가 늘 기쁘게 살아가길 원하시듯 영적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신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다시 사랑하는 사이의 관계로 돌아가서 사랑하는 사이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언약, 곧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가르치심이었습니다.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과 설명을 드리면, 가령 세상을 살아가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되면 서로 지켜야 하는 약조와 언약, 그리고 정절이 있지요.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는 사랑의 관계가 금이 가고 깨지곤 하지요. 주님의 감동하심은 우리와 주님 사이의 사랑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지켜야 할 언약과 약속, 그리고 정절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인 사랑의 생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변치 않으시는 분이시니, 당신의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지요. 그러니까 문제는 우리 편에서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엇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이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오늘 사랑의 고백에 관한 말씀과 글은 주님께서 이 부분에 대하여 직접 가르치신 말씀을 적음으로써 마칠까 합니다. 주님의 가르치심 속에서 저와 여러분 다시금 주님과의 사랑의 지켜야 할 언약과 정절을 새겨보면 싶습니다. 주님께서 성령 안에서 감동하시며 이르셨습니다.


“사랑의 관계에는 서로의 언약과 정절이 생명이다. 그런데 너와 나 사이의 지켜야 할 언약과 정절은 말씀이다. 그것이 너와 나 사이의 사랑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다”


“네가 나의 계명과 말을 지켜 행하면, 이로써 나를 향한 너의 사랑이 진정이며, 이로써 온전한 생명의 연합과 하나됨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됨이니라”


“말씀이 너와 나 사이 사랑의 생명 다리이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 거하라. 계명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니라” 아멘!!

 

                     <글쓴이 :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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