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지식인지는 모르지만 교사시절 사이언스 잡지에서 흥미로운 과학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계의 양과 음의 에너지, 곧 두 종류의 물질계였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하나도 없으니 숫자로 표현하면 0이요, 논리적으로 말하면 하나도 없으니 하나도 없는 무(無)의 상태이지요. 그런데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습니다. 빚을 냅니다.
그러면 갑자기 하나도 없던 무의 상태에서 두 종류의 존재가 생깁니다. 하나는 수중에 돈이 생겼고, 또 다른 하나는 없던 빚이 생겼습니다. 하나도 없던 세계에 양적 에너지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현금이 생겼고, 음적 에너지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빚이 생겼습니다.
사이언스 잡지에서 읽은 기사는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태초에 이 우주에는 아무런 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면 평평한 땅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곳에 삽 등으로 흙은 파 냅니다. 그러면 없던 구덩이가 생기고 또 솟아오른 흙덩이가 있게 됩니다. 솟아오른 흙덩이를 양적 에너지라고 보면 생긴 구덩이는 음적 에너지이지요.
사이언스 잡지의 현대 물리학에서는 물질계를 이렇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질계들은 양의 에너지를 가진 물질들이고 그렇지만 우리가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음적 에너지의 구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멍 속으로 양적 에너지를 가진 존재하는 물질이 들어가면 음적 에너지의 구멍이 채워지면서 순간 양적 에너지의 물질도 사라져 버리고, 다시 아무 것도 없음의 상태, 곧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주는 근원적으로 양의 에너지를 가진 물질계와 반대로 음의 에너지를 가진 그런 구멍과 같은 것이 동일한 비율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계의 생성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듯이, 혹은 땅을 삽으로 파듯이 그렇게 음적 양적 에너지의 존재로 분리해 버림으로써 세상의 만물은 존재하고, 언젠가는 다시 두 에너지계가 합하여 지면서 다시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지요.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우주의 신비, 우주와 자연의 신비는 도대체 그 깊이가 얼마일까요? 아인슈타인은 말하기를 우리가 아는 자연의 과학적 진리는 저 수많은 바닷가의 모래의 한 움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지요. 우주는 하나님의 신비만큼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없다는 무(無)는 우리가 말하는 전혀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nothing의 개념이 아닌 마치 무한하고 빈 도화지처럼 수많은 변화무쌍한 것을 창조해내고 이루어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또 다른 깊은 의미의 무(無)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성경의 본문에서는 사단적인 어둠, 빛과 어둠의 대조적인 그러한 어두움이 아닌, nothing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의 무(無)처럼,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 이전의 본질적인 무한한 창조의 본질적인 어두움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창15: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창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무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깊은 임재 가운데 빛이 아닌 깊은 어두움이 임하므로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임재 경험 속에는 빛이 아닌 이런 깊고도 떨리도록 두려운 정말 더 이상 어두울 수 없는 절대 암흑, nothing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의 절대 어두움의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동시에 모든 창조의 근원인 무한한 창조성과 전능성의 본질적인 흑암이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어쨌거나 조금 흑백적 논리 같기는 하지만, 영계와 정신계와 물질계는 양적인 빛의 세계와 음적인 어두움의 세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에 속한 것들이 빛의 세계요, 양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반면에, 사단의 나라와 그에 속한 것들이 음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혼적인 부분에서는 사랑, 기쁨, 평강, 인내, 절제 등 성령의 열매와 같은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양적인 에너지의 세계라고 생각해 본다면,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음란과 탐심과 같은 것들은 어두움의 세계에 속한 음적 에너지의 기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육적인 자연계에서도 이원적 구분이 다소 무리이기는 하지만, 분명 아름다운 과일, 신선한 채소 등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양적인 에너지의 물질이 있는가 하면, 마약, 술, 담배, 독약 등 우리의 몸과 마음에 어두움과 죽음을 불어넣는 그러한 물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에너지는, 이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말미암고 그것이 본질이듯이 영적인 음양의 에너지가 가장 본질적인 것이지요.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래서 혼적으로나 육적으로 아무리 양적인 에너지를 많이 누린다 하여도, 본질인 영적인 세계에서 어둠에 속해 있다면 사람은 공허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세상의 것들을 많이 누리지 못하고 빈곤할지라도 영적인 세계의 밝은 에너지를 많이 소유하게 되면 영과 마음에는 한없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환한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이 밝아집니다. 그러나 달도 별도 빛을 발하지 않는 어두움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공포가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려면 양적 에너지가 충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양적 에너지가 충만한만큼 사람은 생기를 찾고 활력을 찾고 생명 안에서 생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양적 에너지의 근원은 하나님, 곧 모든 영적인 세계의 절대적인 빛의 근원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적인 에너지, 빛으로 더욱 충만한 삶을 살아가려면 더욱 빛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환하고 밝은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한 본질적인 신령한 생명의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빛 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세계에도, 그리고 물질적인 세계에도 이러한 음적인 에너지와 양적인 에너지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면 우리 속에 밝은 양적인 에너지와 빛이 더욱 충만해져 갑니다. 기분이 좋고 마음이 밝아지고 삶에 활력이 넘칩니다.
하지만 시기하고 질투하고 악하고 더러운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면 점점 빛은 소멸되어가고 어두움이 마음에 임하여 우리는 마음이 어두워져 가고 삶의 활력을 잃어버립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성경은 인격이시요, 영이시요, 한편 거룩한 능력과 모든 양적인 에너지와 빛의 근원인 성령을 그러한 혼적인 어두움의 삶으로 소멸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지요.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살전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앞으로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전 존재에는 이러한 양과 음, 곧 빛과 어두움의 영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예배하는 등의 모든 신령하고 거룩한 삶의 행위는 본질적인 영의 양적 에너지의 충만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등 모든 것들에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물과 장소에도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가려 보고 듣고 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누구를 정죄하거나 화를 내거나 하면 음적인 에너지가 발생하여 양적인 에너지와 빛을 소멸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그만큼 우리가 양적인 에너지를 잃어버리고 마음의 빛과 기쁨을 잃어버리며 영적인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나간 독한 욕설과 화의 말은 상대방에게도 흘러가 그 사람에게도 어두움이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화와 짜증을 낼 수 있고 이렇게 어두움의 에너지의 파장은 흐르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랑과 은혜와 덕을 끼치는 말을 한다면 하는 자신에게도 성령 안에서 더욱 밝은 빛과 양적 에너지로 충만해지게 되지만, 더불어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도 더욱 밝은 빛과 양적인 에너지를 전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적 음적 에너지는 이처럼 서로에게 흐르는 것입니다.
양적인 에너지의 건강하고 신선한 음식들과 풍경이나 장소는 양적 에너지를 전해주지만, 술과 담배와 마약과 술집과 유흥장소와 같은 곳은 우리에게 음적 에너지를 전해주어 빛을 빼앗아 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수치로 표현하면 양적 에너지가 높은 차원 높은 영적인 세계를 거닐다가 다시 낮은 세계로, 때로는 어둠의 세계로 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상승과 하강이 있는 것입니다.
상승인 때에는 기쁨과 평안과 활력을 누리지만, 어두움의 때에는 우울과 불안과 무기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하고 활기차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려면 영계나 정신계나 물질계 모든 곳에 흐르는 이러한 양적, 음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알아서 언제나 빛과 양적인 에너지를 충천하고 채우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생명과 활력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도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양적 에너지, 곧 빛의 양만큼 우리는 천국을 이 땅에서도 이미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주님께서 깨닫게 하신 계시적인 깨달음을 잠시 나누려고 합니다.
가령 꽉 밀폐된 공간에, 전혀 에너지가 새어나갈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에 아주 작고 희미한 전등이라고 계속 켜 둡니다. 이 공간은 절대로 빛도 어떤 에너지도 새어 나갈 수 없습니다.
자 그렇게 장치를 해 두고 스위치를 켜서 불을 켭니다. 방은 넓고 큰데 작은 전구이다 보니 희미하고 그리 밝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켜 둔 채로 오랫동안 둡니다. 가령 한 일여년 동안 둡니다. 그리고 1여년 후에 문을 열어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그곳은 어쩌면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됩니다.
왜 일까요? 에너지는 보존되며 상실되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전혀 에너지나 빛 어떤 것도 세워나갈 수 없는 공간이라고 가정하였기 때문에 비록 작은 전구이지만 그곳으로 우리가 계속에서 전류를 공급하여 그리하여 빛을 공급하였으므로 빛은 누적됩니다. 양적 에너지는 계속 차 오릅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흐르면 눈이 부시도록 밝아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는 수십 억, 어쩌면 수 조개도 넘는 별들이 빛을 냅니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엄청난 역사를 지닌 우주는 어두움은 없어야 합니다. 대낮처럼 언제나 환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왜 밤이 있고 어둠이 찾아오고 어두울까요?
그것은 이 우주가 끝없이 빛의 속도로 팽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신비를 다 알 수 없지만 이 우주는 지금도 빛의 어마어마한 속도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갖 별에서 빛의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지만 여전히 어둡고 또 블랙홀이라는 빛도 삼키어 버리는 존재들이 있어서 계속 어두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절대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끝없이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빛인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시고 비추어 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마음은 점점 그 빛으로 차지 않고 자꾸만 어두어질까요?
이것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성경 속의 한 단어를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저갱”이었습니다.
무저갱은 글자 그대로 바닥이 없는 끝이 없는 불랙홀과 같은 무한의 어둠의 낭떠러지요, 구덩이요, 모든 빛을 집어 삼키어 버리는 끝없이 빛을 빼앗아 자꾸만 세상에 어두움을 안겨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곧 사단의 나라는 무저갱,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거룩한 생명의 빛과 에너지를 끝도 없이 무한히 소멸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없이 빛을 방출하시는 무한의 빛의 근원이시라면 어두움의 나라인 무저갱은 또한 한없이 빛을 빨아들여 없애버리는 무한의 어두움인 것입니다.
이 무저갱의 흑암의 세력은 그러므로 끝없이 우리 속에 어두움으로 다가와서 하나님의 빛을 소멸 시켜 버리려 하고, 서로 싸우게 하고 미워하게 하고 온갖 불의한 것과 더러운 것을 하게 하는 어두움을 자꾸만 우리의 마음에 넣어주고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온갖 염려과 근심과 두려움을 넣어주어서 이 빛을 한량없이 무저갱 속으로 뺏어 넣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은 몇 가지 영적 원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무저갱의 흑암의 세력은 끝없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신령한 빛과 양적인 생명의 에너지를 빼앗아 가려하는 도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서 이 빛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깨닫게 하신 다른 원리는 유류상종의 원리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거룩한 경건한 삶에 애써서 양적 에너지를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빛 속에 거하면 빛에 속한 존재들이 우리 주변에 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우리가 어두움에 속하면 유류상종의 원리에 의하여 어두움의 존재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는 자는 더욱 있게 되고 잃은 자는 더욱 잃게 되어, 빛의 사람은 더욱 빛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두운 사람은 결단하고 어두움과 치열한 영적 전쟁을 함으로 승리하지 아니하면 더욱 어두움의 사람이 되고 마침내 저 사단의 어두운 나라로 자신도 마침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어두움을 좇는 자 마침내 영원한 흑암에 거하게 될 것이고, 빛을 좇는 자 마침내 영원한 영광의 빛에 거하리라” 말씀하신 주님은 마지막으로 하나의 원리를 더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양적 에너지의 양, 곧 빛의 수준만큼 어두움의 세력에 저항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원리에서도 마찬가지이요. 힘과 에너지가 센 것이 약한 것을 이기지요.
우리가 빛으로 충만하고 거룩하고 신령한 에너지로 충만하다면 어두움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 상태가 낮고 빛과 에너지로 충만하지 못하다면 작은 사단의 공격에도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어두움의 공격도 능히 이길 수 있게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글을 맺습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영적인 세계나 마음의 세계나 이 물질의 세계나 모두 빛과 어두움, 양과 음의 에너지의 흐름이 있습니다. 모든 것들에 다 그러한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는 경건한 삶에 성실하여 늘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빛과 성령의 신선한 기름부음을 우리는 늘 받아야 하고, 둘째는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사람을 사귀는 것, 생각과 말,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양적인 에너지를 더해 주기도 하고 뺏어 가기도 하는 것을 알아서 말씀 안에서 유의하며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충만한 빛과 양적 에너지를 소멸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써 성령으로 충만하고 또한 성령을 근심시키거나 소멸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삶을 산다면 우리 속에는 점점 더 밝은 빛이 가득하고 양적인 에너지가 충만하여 져서 점점 더 높은 영적인 세계, 하늘의 거룩한 영광으로 점점 나아가게 되며, 그 빛을 누리는 만큼, 양적인 에너지로 채워지는 것만큼 우리는 이미 우리 속에 천국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영의 원리를 알아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한 생명의 빛과 에너지,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님의 가득한 임재와 영광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할렐루야!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