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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원리] 초자연적 능력의 회복

초록 등불 2011. 11. 24. 15:46

 

  [영의 원리] 초자연적 능력의 회복

 

어린시절부터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들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그런 일과 아울린 추억도 많습니다. 대학을 다니다가 잠시 휴학을 하며 군 생활을 할 때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운 기억이 납니다.


체력이 약하여 정규군이 아닌 요즘 말로 하면 단기사병의 책무가 주어졌기 때문에 출퇴근을 하면서 근무하였지요. 힘든 군 생활과 또 젊은 사람들은 다 고향을 떠나버리는 시골마을의 특성상 함께 하는 강아지가 제 생활의 친구이자, 또 즐거움이기도 하였지요.


그 강아지와 얽힌 사연은 짧은 소설을 쓸 만큼 길지만, 오늘 주제와 관련된 한 이야기만 전하고 싶습니다.


무척이나 이뻐하며 애정을 주고 기르고 있는데, 어느 하루부터인가 갑자기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정이 많은 편이라 어린 강아지가 식사를 하지 않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시골에서는 동물에게 쓸 돈이 없던 가난한 형편, 하루는 무작정 돈도 없이 좀 살려다라고 안고 수의사를 찾아가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그날 따라 모든 수의사 병원이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데리고 와서 그냥 애태우며 지내다가 삼일 째 되는 날, 혹시나 하고 요구르트를 하나 가지고 가니, 이게 웬일입니까? 물한모금 먹지 않던 녀석이 일어나서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조금씩 식사를 하고는 회복이 되었지요.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동물을 길러보면 우리 인간과는 달리 배움을 통한 지식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아는 천부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기르던 강아지는 자신의 몸에 병이 든 것을 알고 지금은 먹지 않아야 낫는다는 것을 알고는 굶은 것이지요.


이런 초자연적인 본성적 능력은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신기 차원을 넘어 신비스럽고 신묘하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소나 염소나 토끼 등은 자신이 먹어야 할 풀과 독초를 가려낼까요? 또 평소 풀을 먹지 않는 강아지도 자신이 어떤 병에 걸리면 스스로 그 치료를 위해서 때로는 어떤 종류의 풀을 스스로 뜯어 먹을까요?


우리가 조금만 멀리 나가면 방향감각과 거리감각을 잃어버리는데, 어떻게 철새는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그것도 정지 상태가 아닌 자전하는 지구 위에서 그렇게 정확하게 자신이 날아가야 할 곳을 알고 날아갈까요? 우리처럼 온갖 첨단 항법장치도 없이 그렇게 날아갈까요?


동물들과 아울러 곤충이나 식물들도 한편 살펴보면 어떻게 아무런 지식이나 배움이 없이 그렇게 신기하게도 본성적으로 놀라운 생을 살아갈까요?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배운 지식이 아니요, 하나님이 천부적으로, 천성적으로 그들에게 부여하신 놀라운 초자연적 본성적 능력 때문이지요.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만 그런 초자연적 본성의 능력을 상실하고, 학교에서 배우고 익히고 우리들의 과학지식을 이용하여 문명의 이기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참 무능한 모습을 봅니다.


가령 우리 중 누군가를 저 깊고 깊은 산중에 아무런 과학기계문명의 계기 없이 눈을 감기고 데려다 놓으면 과연 제대로 찾아올까요? 고작해야 해가 떠는 방향 등으로 방향은 어쩜 가능하겠지만 실상 그것도 알고 보면 우리의 천성적이며 본성적인 능력이 아니라 배운 지식의 결과일 뿐이지요. 이처럼 인간은 정말 놀라운 지능을 지니고 위대한 과학문명을 이루었지만 천부적인 본성의 초자연적 능력면에서는 거의 모든 능력을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그런 초자연적 그리고 본성적인 영의 능력을 거부하고 인간의 지식 곧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스스로 판단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겠다고 혼적 주인의 삶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나무는 다른 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안에서 사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처럼 스스로 지혜롭게 되어 자신의 지식과 판단으로 살아가겠다는 그릇된 의지적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사단이 무엇이라고 유혹하였습니까?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도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하나님처럼 지식을 가지게 되어 살고픈 욕망에 유혹당하고 그것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그의 바람대로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지요.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그들이 그 열매를 먹은 후에 알게 된 첫 사실은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벌거벗음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그 열매를 먹기 전에는 온전히 영 안에서 그러한 선과 악, 옷을 입었거나 벌거벗었어나 아무런 차이 없이 모든 의식들이 온전히 다스려졌기에 모든 선한 것들과 빛들의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열매를 먹는 순간, 옷을 입는 것과 벗은 것,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과 빛과 어두움 등으로 그들의 의식 세계에 없던 의식의 분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 나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주신 천부적인 본성과 그 능력을 좇아 살게 하는 생명나무가 아닌, 인간 스스로 자신의 지식과 지능으로 살게 하는 하나님과 그분께서 주신 초자연적 능력과의 단절을 가져오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식은 얻었으나 생명 되는 지혜를 읽어버렸고, 뛰어난 지능과 쌓은 지식으로 놀라운 과학문명을 이루었으나 초자연적, 천부적이고 본성적인 초능력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살아가다가 어떤 신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기타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세계적인 거장의 음악, 그것도 악보도 전혀 공개되지 않는 음악을 몇 번 들으면 그냥 따라 연주를 하는 사람 등 인간의 지식과 지능이 아닌 정말 하늘에서 그러한 재능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 지식의 나무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따 먹기 전에 인간이 지녔던 천부적인 능력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수천 년의 뿌리를 지닌 한의학은 당시에는 아무런 과학적 실험 시설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교육이 아니라 깊은 사색과 깨달음을 통하여 나름의 학문체계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과학적으로 그 모든 것들이 정말 뛰어난 학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지식이 아닌 깊은 명상과 묵상의 깨달음을 통하여 이룩한 사람들의 업적은 한편 인간이 타락하기 전 천부적으로 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문명이 발달해갈수록, 지식이 쌓여갈수록 우리는 천부적인 본성과 그 능력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지식에 의존하고 지식에 의하여 살아가며, 천부적이며 본성적인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머리에서 나오는 허상이며, 참된 것은 지혜로 가슴에서 나오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부적인 능력과 초자연적 초능력의 남아있는 작은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코에 생기(루아흐)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초자연적 능력을 지녔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불어 넣어주신 그 생기, 루아흐 때문이었습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러나 스스로 범죄하고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우리의 영은 죽음을 맞게 되고 모든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다시금 그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로써 참으로 많은 것들이 서로 대비를 이루며 하나는 본질이요, 하나는 그림자로써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대비를 이루고 계시며, 창조 후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과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시며 숨을 내신 것 또한 그러한 대비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의 생기를 죄를 범함으로 잃어버린 인간에게 예수님은 성령을 불어 넣어주시는 흉내를 내시면서 성령을 받게 되면 새로운 생기, 곧 루아흐를 가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새로운 생기, 곧 하나님의 생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과 선악과의 결과인 우리의 지식과 이성을 좇아 살아가는 삶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삶이고, 후자는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서 자신의 지식과 이성과 판단을 좇아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앙생활이란 나아가 신앙의 성장과 믿음의 성장과 영성의 훈련은 결국 선악과나무의 결과인 인간의 지식과 이성과 판단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합을 이룸으로써 그분이 주시는 말씀과 능력으로 살아가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지식과 판단과 이성과 과학문명의 여러 가지 높이도 쌓아올린 바벨탑을 무너뜨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이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영성의 삶, 믿음의 삶을 살아가려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지식과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철저하게 십자가의 도외에는 다 버려야 합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바울은 똑똑한 사람이요, 학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성령의 능력 안에서의 초자연적이며 초능력의 세계를 알고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식은 결국 허상이며 아무런 생명도 얻게 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안에서 주어지는 성령의 능력만이 초자연적인 능력과 초자연적인 참된 지식을 공급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바라보면 영성의 삶이란 우리들의 지식과 이성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참되이 믿으며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하고 있지요.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치유의 이적을 행하실 때도 가끔은 이상하게 병을 치유하셨습니다.


병자를 향해서 침을 뱉기도 하셨습니다.


막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침을 뱉어 그 침으로 흙을 으개어 눈에 바르기도 하셨습니다.


요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예수님께서 어쩌면 더럽게도 생각될 수 있는데 이렇게 하신 연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인간의 지식을 멸하기 위함입니다. 선악과나무를 멸하시고 우리의 심령 속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생명나무를 심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는 우리의 지식과 이성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기묘하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방법, 곧 선악과나무가 아닌 생명나무를 좇아 사는 법을 배우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고 기도에 열심인 사람들은 다수 경험을 하셨겠지만,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능력들은 우리의 이성과 지식을 초월하며 그러한 것들로는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어떻게 베드로의 그림자가 지나갔다고 하여 병이 고침을 받습니까? 어떻게 바울의 손수건을 가져갔는데 병이 났습니까?


이성은 전혀 믿어지지 않는데,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먹은 우리의 눈에는 원시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데, 어떻게 인간의 놀라운 의술문명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들이 단숨에 치유되기도 하고 회복이 됩니까?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냥 온전히 그렇게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물 위를 걷기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풍랑을 향하여 명하면 순종하였을 놀라운 영권과 초자연적 능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동물들을 데리고 왔을 때 거침없이 이름을 즉시로 지어줄 수도 있는 그런 지혜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신앙의 삶, 참된 영성의 삶, 참된 능력의 삶으로 들어가려면 첫째는 성령의 세례를 받음으로 다시금 하나님의 생기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과 그 말씀의 세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잃어버린 본성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흐름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흐름 안에서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알게 되며, 우리 입술의 말로 살리기도 하고 사단의 권세를 능히 대적하며 쫓아낼 수 있는 하늘의 영권도 임하는 것입니다. 손을 얹은 즉 병이 치유되며,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현재나 미래나 무엇을 해야 하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잃어버린 그 생기(루아흐)를 회복시켜 다시금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고, 더불어 잃어버린 천부적이며 초자연적인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한번은 아시는 목사님께서 병원에 입원을 하셔서 병문안을 간 적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분의 누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영 안에서 그분을 한번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부부관계 쪽으로 검은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영으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자녀들이나 다소의 앞날에는 평안과 빛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신체의 어느 부위가 약한지가 지식이 아니라 본성 안에서 느껴집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서 물어보니 오래 전에 개인적인 사연으로 남편과 헤어지신 분이더군요. 그리고 약간의 디스크 증상을 앓고 계신데 대스크 증상은 대부분 대장의 기능의 이상으로 인하여 생깁니다.


그리고 물론 성령께서 조명을 해 주셔야 하는 부분들이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중보하면 그 사람의 심령상태와 처한 환경과 문제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냥 알게 될까요?


어떻게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나 지식을 받은 적이 없는데, 그냥 알아지고 보여지고 느껴질까요? 바로 이러한 것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본래 우리 안에 주신 천부적이고 초자연적인 영의 능력을 회복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인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것도 신비한 능력도 아닌, 아무런 지식과 배움의 기회가 없었는데도 초식동물들이 무슨 풀은 먹어야 하고 무슨 풀은 먹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과 같은 태초 우리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본성과 능력이 성령 안에서 회복되어져 가는 것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와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그렇게 분류해 놓은 것이지, 실상 죽어있던 영이 살아나고 강건해져 가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태초에 우리에게 생기(루아흐) 안에서 주셨던 영의 기능들이 회복되어져 가는 것인 것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천부적인 본성의 삶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물과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을 말하는 것이며, 육이 아닌 영을 좇는 삶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지식과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영성의 삶이란 결국 우리의 지식과 지혜들을 다 버리고 내려놓으며, 그 자리에 하나님과 말씀으로 더욱 채워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신 것처럼, 우리는 가지요 그분은 나무이니 접붙힘으로 그 분 안에 거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 안에 거한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인 것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살아가다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 한없는 희락과 평강과 기쁨을 누릴 뿐만 아니라, 잃어버렸으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회복되어진 생기(루아흐)를 통하여, 높이 쌓아올렸으나 실상은 허상이요 거짓인 지식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지식이나 이성이나 판단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우리는 본성적, 초자연적, 그리고 초능력이라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회복된 천부적 그리고 본성적인 영의 능력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출처 및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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