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조금 여유가 있다고 하면 여유이고 적적하다고 하면 적적한 시간이 저녁 약간의 시간입니다. 그 외의 시간은 거의 쉴 여유도 없고 경건의 시간을 갖거나 일을 합니다. 그래서 낮에 잠시만 다른 볼일이 생겨도 그 날을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쨌거나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때론 잠시 나가 운동을 하고 오면 그 시간도 쉬 지나가 버리지만 그래도 보통 약간의 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끔은 그 시간에 조금은 조용하고 차분한 사극과 같은 드라마를 하면 잠시 보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예민해져 가면 영적 에너지의 흐름에 민감해집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에, 특별히 말에 강력한 영의 에너지가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빛의 에너지에는 영이 기뻐하고 힘을 얻지만 어둠의 에너지의 흐름에는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끄럽게 수다 떠는 소리, 별로 건전하지 못한 내용을 다루는 드라마의 이야기, 조금은 세속적인 것들을 주제로 사람들을 웃기는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 등등을 보기가 다소 힘겨워집니다. 일반적으로 방송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것들이 영적으로 보면 도움이 되기보다는 아닌 것들이 더 많습니다. 어둠에 속한 영의 에너지가 대부분 흘러나옴으로 힘겨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텔레비전의 방송 중 볼만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다소 차분한 분위기의 사극이나 조용한 바둑 프로그램 등은 조금 낫지요. 조용한 클래식 계열의 음악방송이나 자연 다큐멘터리와 같은 것은 별스런 부담 없이 듣거나 볼 수 있지요. 물론 기독교 방송은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구요.
어쨌거나 제가 조금 쉼을 가지고 쉬는 시간은 저녁의 약간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는 일을 하거나 경건 시간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적당한 쉼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조용히 쉼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조용히 쉼을 갖습니다.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쉰다”라는 말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은 표현이 생소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성령의 역사와 임재를 어느 정도 경험하신 분들은 대부분 이해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과 운행하심 안에서 조용히 영과 혼과 육이 안식을 누리는 것이지요.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새근새근 잠을 자면서 쉼을 누리듯이 그렇게 성령 안에서 안식과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루 저녁, 저의 다소 고단한 몸과 마음을 아셨는지 성령께서 영으로 너무나도 조용하고 아늑한 초록의 숲을 펼쳐 보여주시더군요. 은은히 짙은 초록의 숲에 누워있는 것처럼 느껴지니 몸과 마음에 편안함과 초록빛 쉼이 조금은 더욱 실감 있게 찾아오더군요.
언젠가부터 하얀 비둘기 형상으로 언제나 곁에 계신 것을 보여주시는 성령님, 성령님을 상징하는 하얀 비둘기만 곁에서 조용히 날기도 하고 앉기도 하는 등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고, 세상과 만물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조용하고 은은히 짙은 초록의 숲에 성령님을 상징하는 하얀 비둘기와 저만이 쉬며 말없이 교감을 나누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종종 저녁 시간에만 갖는 이 시간이 어쩌면 제게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기도와 말씀, 찬양 등의 경건시간도 성령 안에서 한없는 희락을 누리곤 하지만, 고요함과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시간은 고요의 기도, 안식의 기도로 성령 안에서 쉬는 저녁 한 때의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면 처음에는 수없는 대화를 많이 나누지만, 사귐의 시간과 사랑의 깊이가 깊어지면 때론 아무런 말이 필요없지요. 그냥 말없이 등을 맞대고 쉬거나 서로의 품에 안겼거나 아니면 각자 다른 일을 하더라고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서로에게 행복이 되고 쉼이 되곤 하지요. 주님, 곧 성령님과의 사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나 생각의 나눔이나 혹은 찬양이나 경배로 사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쉼이 필요할 땐 그냥 말없이 성령 안에서 성령과 함께 조용히 말없이 쉴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이것도 한 기도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쉬는 기도를 고요의 기도나 안식의 기도라고도 표현하지요.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굳이 말을 하거나 마음을 올려 드리거나 하는 제한적인 의미로 생각하는데, 넓은 의미에서 보면 주님과 동행하는 모든 것들이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동행하는 친교의 시간 동안 서로의 마음이 오고 가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것이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아뢰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친교이니까요.
이런저런 영적 거장들의 삶을 살펴보면 진정한 영성과 능력의 세계로의 입문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고 이런 저런 은사를 경험하는 것들이 아니라, 주님과의 친교와 동행, 곧 성령님과의 교제와 동행과 친밀함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더군요.
거슬러 창조시대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태곳적 에녹이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지요. 그렇게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친교와 교통의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들리움을 받았지요.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하나님과 진정한 사랑과 교제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사랑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지어셨습니다.
사랑으로 대상으로 지어셨는데 만약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고 로봇처럼 지으셨다면 기계적으로 조작되어지는 사랑이 무엇이 기쁘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우리가 로봇인 애완견을 하나 사서 리모콘으로 조작하여 뛰게도 하고 춤을 추게도 하고 꼬리를 흔들게도 하는 것과 다를 바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진정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 주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 진정한 교통, 서로에게 진정한 행복을 안겨주는 사랑의 대상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절대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것은 하나님도 사단도 함부로 조정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아니하거나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셨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요 간절한 바람이시기에, 우리를 향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이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 또한 우리의 그러한 사랑을 너무도 받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친교와 교통, 곧 깊은 영적인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영성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 본질 안에서 사역도 있고 복음 전파도 있고 은사와 능력도 있고 체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제하고 동행하는 그것이 본질이요,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본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거나 본질 안에서 행해지는 섬김의 능력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의 진정한 사랑, 곧 세상을 버리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연인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선물을 준비하고 기다리듯,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빛의 나라, 영광의 나라, 생명의 나라를 예비하고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는 불타는 사랑으로 부르고 또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진정한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언제나 세상을 향하려고만 하지요. 하나님 안에 진정한 행복과 쉼이 있는데 탕자처럼 집을 자꾸만 떠나려고만 하지요. 그리고 본질적으로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 당신을 구하는 곳에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복을 구하기가 일수이지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자기가 지닌 부와 명예를 사랑하여 다가오는 듯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지요. 그렇게라도 다가오면 사랑하는 이가 가까이 오니 싫지야 않으시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서운하실까요?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사모하며 나아가십시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과 이유요, 우리에게 바라시는 본질이요, 또한 우리가 진정으로 생명과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길입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영, 주님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께서 비둘기의 형상으로 가만히 저를 쳐다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눈빛 속에는 당신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얼마나 우리의 참되고 진실된 사랑을 기다리시는지가 보입니다.
참된 영성의 삶은 무슨 은사를 받거나 한 때 뜨겁게 기도하는 그런 일시적인 체험이나 시간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와 교통에서 오는 것입니다. 깊고도 깊은 교제와 사귐의 세계 속으로 나아갈수록 더 깊은 주님의 임재와 영광을 맛보고, 나아가 자신의 삶의 변화와 세상을 섬기는 능력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교통의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잠시 세상의 것들을 떠나 주님과 단 둘이 보내는 영적인 피정의 시간입니다. 예수님도 그 바쁜 일상의 와중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아 아버지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가지곤 하셨지요.
막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눅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물론 우리는 하루 종일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 속에서는 온전히 주님과 교통하거나 교제하는 것은 쉽지 않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바쁜 일상에서 잠시 완전히 떠나 온전히 주님 앞에서, 주님과 단 둘이 보내는 영적 피정의 시간은 매일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는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그리움으로 말미암아 생활 속에서 수시로 전화하고 문자하고 편지를 주고받고 하지만, 또한 정말 서로 시간을 내어서 만남과 함께 있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아무리 일상 속에서 많은 방법들을 통하여 시시때때로 교감한다고 하여도 온전한 만남의 시간, 정기적으로 만남의 시간과 횟수가 줄어들면 결국 소원해지고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쁜 일상이지만, 불필요한 일상의 가지치기와 잘라내기를 통해서 주님과 단둘이 보내는 경건의 시간, 영적 피정의 시간을 반드시 가지십시요. 그리해야 참된 영성의 삶, 주님과의 깊은 친밀함의 세계, 그리고 자신의 삶의 변화와 더불어 섬김의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저는 특수한 개인적 목회환경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주님과 보내는 영적 피정 시간 속에 있지만, 가장 편안하고 안식과 쉼을 누리는 시간이 저녁의 잠시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기도도 말씀도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성령 안에서 고요의 기도로 쉽니다.
일상의 수고로움에 지쳐 서로 위로가 필요한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아무런 말도 없이 등을 기댄 채 혹은 품에 안긴 채 가만히 있어도 마음과 육에 잔잔한 위로와 새 힘을 얻게 되듯이, 제게는 어쩌면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시간인 듯 합니다.
여러분도 바쁜 일상 속에서 기도와 말씀의 시간을 갖지 못하였다면, 이 영적 피정의 시간에 가능하면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말씀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지만, 곤한 날이면 그냥 주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가만히 안식하고 쉬십시요. 그렇게 하셔서라도 주님과의 영적 피정 시간을 가지십시요.
때로는 교회에 기도하러 갔다가 곤해서 그냥 잠만 자고 오는 경우도 있지요. 하지만 잠만 자고 왔는데도 영이 맑아지고 함양되어진 것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냥 그분 안에서 가만히 쉬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영은 함양되고 충전되어지고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져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어루만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그리스도인이 참된 영성의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날마다 주님 앞에서 세상과 세상일과 가족들도 잠시 멀리한 채 오직 주님 앞에서 혼자 갖는 조용한 시간, 영적 피정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와 사귐의 친밀함 속에서 우리의 영은 주님을 닮아가며 성장하고, 영성의 길을 조금씩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나아가 세상을 섬길 능력이 동행하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로부터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잠시 떠나 주님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갖는 영적 피정, 이는 영성의 삶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한 영의 원리입니다.
글을 이리저리 앞뒤와 문맥을 살피며 기록하노라고 애썼더니 다소 곤하네요. 일을 마치면 다시 편안히 누워서 성령 안에서 편안한 영적 피정, 쉼의 시간을 조금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다시 은은 초록빛 쉼의 숲을 열어 보여 주실까요? 그것이 무엇이든 또는 그런 경험을 주시던 아니 주시던 저는 행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곧 성령께서 저의 사랑의 대상이시요, 본질이요, 목적이니까요. 그분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제 곁에 계심을 아니까요. 우리를 사랑으로 지으신 성삼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눅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