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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글] 초록빛 신비

초록 등불 2012. 6. 12. 23:45

 [영성의 글] 초록빛 신비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면 저 우물 안에서도 나와 친구들의 모습이 나를 쳐다봅니다. 우리가 환하게 웃으면 우물 속의 아이들도 환하게 웃었지요.


이제는 아이도 아니고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데, 초록빛 숲의 벤치에 곤한 몸을 누워서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천사라고 생각되는 영적 존재들이 귀엽고 예쁜 동서양 아이들의 모습으로 동그랗게 둘러써서 나를 쳐다보고 웃어줍니다. 나는 우물이 되고 그들은 어린시절 우물을 둘러쌓고 내려보던 철부지들 같습니다.


대부분 정말 예쁘거나 귀엽습니다. 개구쟁이처럼 웃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함께 나오곤 합니다.


마치 물로 이루어진 형상처럼, 혹은 액체 유리로 만든 듯 투명한 모습으로 저를 쳐다보고 웃어줍니다. 그렇게 맑은 물로 이루어진 어떤 형상처럼 투명하게 보이므로 육신의 시야를 가리지는 않습니다. 나도 그들을 보고 웃어줍니다.


열린 환상의 세계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이 땅의 풍경과 영으로 보는 영의 존재나 풍경이 함께 어우러져 보이므로, 땅의 풍경이 아름다우면 보이는 영적 풍경도 더욱 한없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굳이 그렇게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도 육의 눈과 영의 눈으로 동시에 바라다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꿈결처럼 아름답습니다. 그야말로 환상의 세계처럼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열린 셋째 하늘에는 무지갯빛이 어려 있고, 그 무지갯빛은 밤이면 더욱 영롱해집니다. 마치 극지방에서 아름다운 오로라가 빛의 향연을 연출하듯 그렇게 밤이면 더욱 영롱해집니다.


그렇게 땅의 풍경과 아울러 열린 셋째 하늘의 신비로운 빛과 어여쁜 천사들과 주님과 비둘기 형상의 성령님 등의 모습을 보며 사는 지금의 세상의 풍경은, 제겐 언제나 아름답도록 황홀한 곳입니다. 바로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인 듯 합니다.


눅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냥 보이는 세상도 이제는 그렇게 아름다운데, 그렇게 은은히 드리워진 아름다운 초록의 숲 속에서 천사 등의 영적 존재들을 보면, 정말로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앞에서 글을 쓴 것처럼 마치 한없이 맑은 물로 이루어진 빛의 어떤 형상처럼 전혀 육신의 시야를 가리지 않은 채 한없이 맑고 곱고 예쁜 모습으로 보입니다. 마치 꿈을 꾸거나 동화 속 숲 속의 요정을 보는 듯 아름다운 빛의 어떤 맑은 존재들이 제 곁을 오갑니다.


예수님의 모습도 언제나 보이지만 아기천사들처럼 저를 향한 구체적인 행동을 자주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초록의 숲에 오면 종종 선연히 함께 벤치에 앉은 모습이나 혹은 아래의 조붓한 들길을 가노라면 함께 거닐어 주시곤 하십니다. 물론 대화는 영으로 나누니 마치 하나님의 음성을 내적으로 듣듯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곤 하지요.


하루는 그렇게 조붓한 들길을 주님과 함께 걷노라니, 성경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엠마오를 향하여 걸어가던 제자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이러한 영적 경험을 두고 때로는 부러운 듯한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제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영적인 경험을 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부럽기는 마찬가지, 주 안에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서로 부러워하며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해감은 아름다운 열정이요, 아름다운 모습이겠지요.


하지만 은사지상주의나 현상지상주의가 되시면 절대로 아니 됩니다. 본질이 아닌 현상과 은사에 몰입하다보면 대부분 사단의 통로가 되는 부분이 생겨서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은사와 능력과 영적 체험은 사모하시되, 성령 안에서 건전하게 사모하여야 하며, 본질은 그러한 현상과 체험이나 은사가 아닌, 먼저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가 온전히 이루고 나아가 세상을 섬기는 삶과 소명이 본질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한 말씀이 아닌 그 부분은 이 정도에서 말씀을 마름합니다.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다름 아닌 고난의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육신의 몸앓이를 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일이라 공개적으로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참으로 이런저런 아픈 세월과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그 육신과 마음의 힘겨운 세월 속에서 몇 해 전 그만 쓰러지고 말았지요.


물론 인간적인 저의 부족함에 기인함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숱한 세월 피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육신과 마음의 힘겨움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그 무게를 감내하지 못하고 그만 육신이 쓰러지고 말았지요.


저도 육신의 성정을 가진 사람, 이 땅의 행복도 한 번쯤은 누려보고 싶은 성정을 가진 사람, 하지만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고도 남을 세월의 혹독하도록 계속되는 육신과 마음과 삶의 시련 속에서 제가 쓰러졌을 때에는 몸도 다쳤지만 실상 더욱 다친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 같은 육신의 통증과 두려움, 그리고 부러져버린 마음의 상처를 안고 얼마나 홀로 때로는 주님 앞에서 울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저의 참된 연단의 시작이었는지 따뜻한 위로 하나 전해주는 사람도 없이, 철저하게 저를 혼자 두셨습니다.


낮에는 조금 답답하니 텅 빈 거실에서 홀로, 밤이면 또 저의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육신의 통증과 질고로 인한 두려움과 그리고 마음의 상처와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과 싸워야했습니다.


굳이 기도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마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처럼 할 일이라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 밖에 없는 캄캄한 밤이었기에 없었기에, 생의 애처로운 본능을 안고 하루 이틀 그리고 한 달 두 달, 그리고 일 년 이 년의 세월을 오직 기도하며 주님 앞에만 있었습니다.


굳이 기도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서라기보다는 아직은 살아있는 생명, 느껴지는 육신의 아픔과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든 누구에라도 토하여 내어야 살 것 같아서, 모든 것을 들어주시는 주님 앞에서 그렇게 토하여 낸 것이지요. 낮이나 밤이나 어두운 거실이나 제 방에서 홀로 속울음을 삼킨 것이 얼마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소리 내어서 울고 때로는 삼키며 울고 참으로 주님 앞에서 “왜 제 생은 이다지도 아픕니까? 아파야만 합니까”라며 참으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간은 그렇게 숱한 아픔의 세월의 삶을 살아오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아픔 그 아픔이 비록 저와 같은 아픔이 아닐지라도 그 마음은 넉넉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사나 텔레비전 방송 중에서 그런 아픈 기사를 보거나 들으면 그 아픔이 그냥 전해져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곤 하였지요.


그러나 2-3 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요나의 뱃속처럼 그토록 칠흑 같고 두렵고 떨리고 아프고 힘든 시간들이, 제 삶을 향한 새로운 하나님의 손길이요,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극렬한 고난과 고통과 두려움과 마음의 상처 속에서 저를 새롭게 빚어 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혹독한 고난의 풀무불 속에 집어넣으셔서  죄의 불순물들을 하나 둘 벗겨 가시기 시작하셨고, 신앙의 기초인 주춧돌부터 다시금 하나하나씩 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결코 짧지 않은 인고의 시간을 걷게 하시더니, 조금씩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이전의 썩고 죽을 육에 속한 사람에서, 육의 사람은 성령의 불로 소멸하시고 조금씩 그리스도의 형상과 마음을 이루고 품게 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결코 쉽지도 않았고 정말로 힘겨웠던 시간들,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썩고 죽을 육의 형상에서 조금씩 썩지 않을 하늘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고 덧입혀 가시며, 새롭게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능력과 신비로운 하늘의 베일을 하나 둘 벗겨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프기만 했던 이 땅의 삶을 위로하시려는 듯 저 신비롭게 푸르른 당신이 계신 셋째 하늘을 열어 주시고, 언제나 하늘에 속한 존재들과 주님과 그리고 비둘기 형상으로 성령님도 오셔서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그렇게 다독다독 봄햇살 빛으로 지속적으로 저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하늘의 위로 속에서 이제는 조금씩 삶의 상처가 아물어 가고, 이 땅에서는 비록 작은 행복도 그다지 누려보지 못했지만, 고통과 슬픔과 눈물과 피로 얼룩진 아픈 땅의 세월이었지만, 가히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 속에서 이제는 땅을 거닐던 삶에서 조금씩 땅이 아닌 하늘을 나는 행복한 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아직 육신의 고통이 거두어지지 않는지는 저도 알 수 없지만, 저는 여전히 아프고 힘이 듭니다. 느끼는 병증의 차이는 매일이 다르지만 조금 곤할 때면 근무기력 환자처럼 말할 힘도 걸을 힘도 없고, 몸에는 늘 식은땀이 흐르곤 합니다.


그래도 운동을 해야 몸의 기력이 유지되고 건강이 유지되니, “앉으면 죽고 서면 산다”는 저의 마음의 깊은 한 신조처럼 시간을 내서 짬짬이 나들이를 겸한 운동을 나갑니다.


그런데 열린 환상으로 보이는 자연계와 영계가 어우러진 모습은 자연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면 더욱 아름답게 보여서, 그리고 초록의 숲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의 쉼을 주어서 종종 찾아가곤 합니다. 하지만, 전기 자전거 곧 전기의 힘이 없으면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전기 동력을 끄고 제 힘으로 저어 가보려면 얼마 가지 못해서 기진맥진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조금씩 열어 주시고 하늘 빛 영광 속에서 저의 마음과 영은 위로해 주셨고 주시고 계시지만, 아직 여전히 육신은 고난 가운데 두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통증과 무기력과 그로 인하여 마음이 힘겨운 날도 없잖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것들에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때로 많이 아프면 다소 견디기 힘들거나 일을 하기가 힘들어서 솔직히 힘들 때도 적지 않지만, 영으로는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난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는, 고난 속에 깃든 또 다른 색깔, 곧 초록빛 신비를 고난 속에서 본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지금 겪고 이 시간의 아픔 속에도 주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고난 속에 숨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고난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나 우리가 겪는 고난이 징벌의 의미이던지, 연단과 성숙의 의미이던지, 혹은 이상치상(以傷治傷) 곧 상처로써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한 사명과 소명으로서의 고난이던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더 높은 경륜과 뜻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토록 두렵고 아프고 외롭고 시간 속에서 주님은 저를 새롭게 빚어 주셨고 하늘의 신비로운 문을 열어 주심을 경험했으니까요. 시편의 다윗의 고백이 한편 저의 고백이 되었으니까요.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비록 이 땅에서는 한 조각 행복도 별로 누려보지 못한 채 육신의 질고로 모진 세월을 감내하며 살아왔지만, 수이 지나고 결국은 썩고 죽을 육신의 삶과 영광이 아닌, 하늘의 신령한 빛과 영화로움과 영원을 보는 눈을 가지게 하셨으니까요.


어느 하루도 전기 자전거를 타고 그곳에 갔더니 몸에 힘이 하나도 없더군요. 그래서 평평한 벤취에 누웠습니다. 저 푸른 하늘의 눈부신 익어가는 여름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추이고 있더군요. 신록의 초록 잎사귀 때문에 숲 속엔 온통 초록빛 생명이 흐르는 듯 합니다.


누워서 가만히 쉬노라니 발치에 주님이 앉아 계신 것이 선연히 보였습니다. 주님께서 “곤하냐?”라고 물으시더군요. “네, 주님 조금 곤하네요”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초록의 보석 같은 잎새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초록의 생명을 의미하듯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소망을 잃지 말아라” 그리고 평안을 전해 주십니다.


속으로 주님께 말없이 대답했지요. “네, 주님 괜찮습니다. 아직 아픈 것은 제가 아직 주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여 더 아름답게 빚으시거나 혹은 이 아픔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안게 하시거나, 제가 알지 못하는 당신의 깊은 뜻과 경륜이 있으시겠지요. 모든 것들에 감사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오늘 이 글과 말씀을 기록하는 것은 신앙상담을 하여보면 참으로 이런저런 아픔을 애소하시는 분들을 접하게 됩니다. 같은 아픔은 아니지만 저도 아픔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육신과 마음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라 그 분들의 심정을 넉넉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전해 드리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그 고난과 아픔의 시간을 결코 부정적으로만 절망적으로만 보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이 없음이라”는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겪는 모든 삶의 고난에는 그 고난이 어떤 연유에서 왔던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으로 하여금 생명과 온전함과 하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초록빛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이 징벌성이라면 우리가 지옥으로 떨어져 멸망하는 것을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인 것입니다. 그것마저 없으면 성경은 하나님이 유기하고 버리신 사생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고난이 있음으로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이 유기해 버리신 사생자가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고난은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요셉처럼 하나님의 뜻이 있거나 우리의 성숙을 위한 것이라면 고난의 끝에는 영광과 하늘의 신비로운 문이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난의 깊은 신비로운 생명의 초록빛을 보게 되면,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이 고백하게 됩니다.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그 고난의 삶 속에서 이 땅의 것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신비롭고 영화로운 빛을 보게 되면, 또한 더불어 우리도 아래의 사도바울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우리는 생을 통하여 육신의 행복과 안락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의 여정을 통하여 육의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으로 빚어 가시고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덧입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땅이 아닌 하늘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곧 영원하고 썩지 않을 하늘의 면류관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땅의 모든 것들은 곧 스러지고 사라지는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진주와도 같은 천국을 사고 침노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를 위하여 사용하시는 주된 방법이 광야, 곧 고난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뒷면에는 영원과 생명과 영광이 숨어 있습니다. 초록빛 생명의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시련과 고난 앞에서 마냥 슬퍼하거나 낙망하지 마십시요.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벧전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위의 야고보 사도의 이름과 같이 늘 경건함 가운데 온전한 인내를 이루십시요. 그리하면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정금과 같은 그릇으로 빚어 주실 것입니다. 고난은 단순한 고난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초록빛 생명의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당신의 형상을 이루어 가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경륜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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