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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글] 주님의 맑은 눈동자

초록 등불 2012. 9. 13. 16:26

   

 [영성의 글] 주님의 맑은 눈동자

 

최근에 제게 3가지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다루심 부분입니다. 군대로 말하자면 훈련기간이 끝나고 자대배치를 받게 되면, 훈련과는 다른 일상이 주어지듯이, 주님이 저를 다루심이 다소 변화되었습니다.


2-3여년 가까운 세월은 뜨겁게 기도하고 열정적으로 주님을 찾게 하시더니, 지금은 고요하고 잔잔한 세계로 이끄십니다. 몸에 겹도록 소리 내어 오랜 시간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 안에서 고요히 있으면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다.


아니 도리어 주님께서 요청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당신의 임재 안에서 고요하게 있으라”


이전에는 성령님께서 눈동자를 통하여 많이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돕는 천사를 통하여 가장 자주 이르시는 말씀이 “주님의 임재 안에서 고요히 있으라. 안식하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라는 말씀처럼 언제나 주님의 임재 안에 고요하게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지천명의 초입에 이른 제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비유컨대 마치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이곳저곳을 좋아라 다니는 어린아이를 엄마가 데려다가 “조금만 가만히 있어. 엄마 품에서 가만히 조금만 있어”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영의 막힌 부분을 뚫거나 억압된 것을 풀어야 하는 시간 외에는 점점 집회도 고요하게 이끌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해보니 주님은 처음에는 우리를 다소 열정적으로 이끄시지만, 영성의 삶이 조금씩 훈련되어져 가면 점점 고요한 세계로 이끄십니다. 점점 더 고요하고 조용한 침묵의 세계로 이끄십니다.


둘째의 변화는 야간 위주로 생활하던 것을 다소 힘겹더라도 주간 위주의 생활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오래된 생활습관이라 바꾸려니 쉽지 않더군요.


세상은 주간 위주로 돌아가는데 저는 건강상 바이오리듬이 야간에 좋아서 야간 위주로 오랫동안 일을 해오다 보니, 사역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생활에도 어려움이 많았고, 아무래도 건강에도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바꾸려고 마음을 먹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삶의 큰 틀을 바꾸려다보니 12시 정각 자정에 드리던 기도를 언제 드려야 하는지도 흐트러지고,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자고 다소 뒤죽박죽이 되면서 일반생활이나 경건생활이나 다소 어지럽습니다.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셋째는 제 영적 삶의 수위 조절의 문제였습니다. 지난 2-3여 년간은 24시간 거의 눈뜨면 기도하고 말씀보고 사역하고, 잠시 운동을 하고 경건생활에 거의 올인 하였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는 자대배치를 받은 것처럼, 열정적인 훈련시간이 지나고 다소 안정적인 삶과 사역으로 이끄시는 듯한 상태, 사람은 영과 혼과 육의 유기적인 존재이니 이 세 가지의 삶을 어떻게 조화롭게 엮어야 하는지가 숙제였습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진 유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만족의 본질 위에, 혼적 곧 마음의 즐거움과 상쾌함, 그리고 육신의 강건함과 생명력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24시간 영적인 일에 거의 올인하다 보면 영적으로는 빛이 충만하고 평안하지만, 가끔은 혼적인 외로움이나 적적함이 찾아와 울적함이 깃들 때가 있더군요.


그래서 한 동안 군대훈련을 너무 힘겹게 받은 병사처럼, 저도 그렇게 올인하던 생활에서 조금 여유를 가지고 마음에 좋아하는 것들도 다소 곁들여 하면서 수위조절을 해보았습니다. 한편 제가 경험해보아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혼적인 즐거움을 주는 다소의 취미생활을 곁들어 생활하니 혼은 즐겁더군요. 그런데 비록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도 영적인 고요함을 깨뜨리는 취미나 기호생활은 비록 짧은 시간일지라도 영적으로 방해가 되고 거슬리더군요. 영은 곤고해지더군요.


취미나 기호생활 중 가령 조용한 바둑이나 장기와 같은 것은 그렇게 영적인 삶에 방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신을 강건하게 하는 운동이나 음악 감상 등도 그렇게 방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란한 것들 컴퓨터 게임이나 요란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시청이나 혼적인 대화가 오가는 사람들과의 수다스런 모임 등 영의 흐름이 좋지 않거나 요란한 것은 모두 영적으로 방해가 됩니다. 모든 것들에는 영들의 흐름이나 영적 분위기의 흐름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것이던 주님과의 영성생활보도다 마음을 빼앗긴다면, 정도가 지나치다면 건강에 좋은 운동이나 사고력을 길러주는 바둑이나, 아니면 애완동물 기르나 화초 기르기 등 어느 것이던 영적인 생활에 방해가 됩니다.


왜 그렇게 우리를 지으셨는지 훗날 주님께 물어볼 일이지만 우리의 영과 마음은 정말로 예민합니다.


이전에도 간간 경험하였지만, 거의 보지 않는 텔레비전이지만 때로 곤하여 조용히 누워 별스런 생각 없이 주님의 임재하심을 잊어버리고 두어 시간 가량 정도만 있다가 제 방으로 돌아오면 성령님의 임재가 사라짐을 느끼곤 하였지요.


큰 둑이 작은 구멍으로부터 무너져가듯 우리의 마음과 영은 작은 것에 흔들립니다. 그래서 매일의 일상에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들 모두를 영분별 하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속의 제사법과 정결법과 생활법 등에서 힘겨웠던 것처럼, 비록 율법의 멍에에서는 자유롭게 되었다 할지라도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의 영성 생활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생각과 분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의 방종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안의 삶에는 반드시 육적 죽음과 자아의 죽음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정결법과 부정법은 신약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분별적 생활을 말씀하는 예표지요.


그런데 저는 여러 가지 환경 특히 체력의 부족으로 누릴 수 있는 취미생활이 많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주기적으로 운동은 잠깐이라도 하지만, 천성적으로 체력이 부족해서인지 운동을 특별히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좁고 깊게 사귀는 편 사람들을 많이 좋아하는 성격도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과의 만남도 조금 힘겹습니다. 이전의 제가 그러했듯 거리에 나가면 그리스인이거나 일반이거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다스림 없이 그냥 혼 안에서 마구 말들을 합니다. 영의 감각이 깨어나면 이러한 영의 흐름들이 느껴지고 지각 되어지고 또한 보여지기 때문에 힘겹습니다. 서로 가까이 하기가 힘겹게 됩니다.


가끔 영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면 육적인 사람은 그 배후에 악한 영의 모습이 검게 어려 보입니다. 그리고 악한 영이 가장 집을 잘 짓는 배 안에는 또아리를 튼 뱀이 보이기도 합니다. 혹 그런 사람과 우연이라도 대화를 나누게 되면 욕설로 시작해서 욕설로 끝을 맺는 세상 이야기를 하지요.


어쨌거나 체력이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람들과 만남을 가끔 갖는 것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고, 제가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작은 혼적인 취미생활에 조금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영적으로 거슬리고 흔들리더군요. 하지만 군대 훈련시간이 힘들었던 병사처럼 영적으로 힘겨움이 느껴지지만 혼적인 취미생활도 다 포기하기는 쉽지 않아서, 주님의 마음과 제 곁에 있는 다양한 영적 존재들의 말과 전해주는 느낌을 살펴가며 수위조절을 해 보았습니다.


캐더린 쿨만의 영이나 천사나 때로는 주님도 “그러한 취미 생활은 내려놓아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지만, 저도 삶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사람, 다 포기하기는 쉽지 않아서 내적인 싸움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며칠간의 내적인 싸움과 갈등 끝에 “이건 아니구나. 어떤 결론을 보아야 하겠구나!” 싶더군요. 그래서 주님 앞에서 앉아 결론을 짓기 위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내적 싸움으로 다소 마음도 영도 힘겨워서 인지 기도도 조금 쉽지 않고, 힘겨워서 자리에 누워 쉬었습니다.


누운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리더군요. 늘 일어나면 느껴지는 수십 년의 육체의 피로감과 통증, 건강하지 못하니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라곤 거의 없었고 없는 내게, “이 작은 삶의 즐거움마저 허락되지 않는 것인가!”


그러다가 저도 몰래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잠을 자다가 눈을 떠니, 잠도 들깬 제 눈앞에 주님의 얼굴이 보이더군요.


주님께서 어떤 영적인 현상을 일으키신 것인지 저는 잘 모르지만, 주님의 모습을 언제나 영으로 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적인 모습은 환상을 보듯이 대부분 하얀 모습으로 보이십니다. 적절한 설명이 어려운데 흑백사진을 보는 것과도 조금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저의 경우 잠을 자다가 눈을 뜨는 시간에 이런 현상이 가장 희미합니다. 왠지는 모르지만 육적 상태가 잠에서 깨어난 상태가 조금 좋지 않은 병증이라서 그러한지 자다가 눈을 뜨는 그 시간에는 영으로 보이는 현상이 가장 희미합니다.


그런데 눈을 뜨니 평소에 보는 하얀 모습의 주님도 아니고, 희미한 것도 아니고 마치 실제 사람을 보듯이 그것도 너무도 선명하게 보듯이 주님의 얼굴이 저를 향해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동자와 그 모습이 너무도 고요하고 맑아보였습니다. 시냇물이 맑으면 그렇게 맑을까요. 호수가 고요하면 그렇게 고요할까요.


제 눈앞에 조금 떨어져 얼굴을 맞대시고 여름날 한없이 맑고 정결한 시냇물 같은 눈빛과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말씀 없이 가슴으로 전해주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영성의 삶은 언제나 이렇게 맑고 고요한 영적 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 취미 생활을 일상에 곁들이면서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주님의 그 맑고 고요한 모습의 빛과 잔잔히 전해 주시는 감동 속에서 여러 가지 변화를 겪는 과정 속에서 며칠 내적 싸움을 벌이던 마음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어찌 가끔의 혼적인 즐거운 생활이나 건전한 육적인 조금의 즐거움도 없이 살랴만은, 주님 안에서 허락하시면 행하며 제 마음은 내려놓기로 하였습니다.

"취미생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허락하시는 것을 해야 하는구나"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내려놓으니 혼은 다소 섭섭해 하나 영 안에는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영성의 삶은 주님께 다루심을 받으며 이런저런 경험을 해보니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도 결코 쉽지 않지만, 자기와의 싸움 지극히 작은 삶의 즐거움마저 주님이 원치 않으시면 내려놓아야 하는 길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온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되지 않는 길입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저 먼먼 이국땅으로 나가서 생명을 걸고서 복음을 전하는 주의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한 삶의 이야기이겠지만, 저의 작은 모습과 경험을 담담히 담아 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작은 도전과 깨달음을 주는 글과 말씀이면 좋겠습니다.


제 모습 앞에서 이런 말씀을 드림도 다소 부끄럽지만, 주님을 따르는 영성의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정말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생명까지 다하기로 작심하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길입니다. 샬롬!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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