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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글] 사랑에 빠진 성령님

초록 등불 2012. 11. 5. 11:27

 [영성의 글] 사랑에 빠진 성령님

 

주일 아침, 집회의 피로감으로 다소 잠이 들 깬 듯 눈을 떠 조용히 누워 있노라니, 하얗고 예쁜 비둘기가 눈 앞을 날며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맑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입니다.


“사랑해”, “기뻐해..”


아주 어린시절 성령님을 만나고 나름 성령님과 더불어 모세의 미디안 광야의 세월만큼 살아왔지만, 성령님과의 사랑, 곧 하나님과의 사랑이 너무도 구체적이고 개인적이고 친밀한 것임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보다 더 크신 분이시지만, 또 한편 정말로 작은 우리의 사랑을 너무도 애타게 사모하기까지 하는 작은 하나님이심은, 비록 본질은 아니지만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 곧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나 전해주는 몸짓의 언어를 통해서였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하듯이 저 역시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며, 전혀 부족함이 없는 크고 대단하신 분으로만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랑은 개인적이고 구체적이고 친밀한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관념적이고, 마치 개인이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듯한 큰 개념의 것으로만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나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성령님의 몸짓의 언어를 통해서 본 또 다른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의 사랑을 너무도 간절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모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다음의 성경 구절이 제대로 이해가 되었고, 제겐 실제가 되었습니다.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약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성경은 야고보 사도를 통하여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시기하기까지 하시며 우리의 사랑을 “사모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성령님의 몸짓의 언어를 통해서 본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개인적이고 구체적으로 너무도 간절히 기다리시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시며 우리의 사랑을 사모하십니다.


너무도 크신 하나님의 한편 이해하기 어려운 다소 영적 신비이지만, 사람의 예를 든다면 강하고 크신 부모님이시지만, 자녀 앞에서는 한없이 또한 작아지시고 자녀의 사랑을 바라는 어버이의 마음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작은 마음을 볼 수 있는 신비적 성경구절이 요한복음에 또한 나오지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시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여기서 주님이 물으시는 사랑은 원어적으로 우정을 상징하는 필로스도 아니요, 애정적 사랑의 에로스도 아니요, 아버이가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는 듯한 아가페의 사랑이라지요.


그런데 아가페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어버이가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토록 크신 하나님은 우리가 마치 당신의 어버이라도 된 듯, 우리에게 우리를 향하여 “그런 사랑을 내게 줄 수 있느냐?, 그렇게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은 너무도 크시고 자족하신 분이시지만, 단 하나 부족함을 느끼시고 기다리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스스로 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당신의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하는 당신께는 너무도 귀한 우리들의 사랑인 것입니다. 진실 된 사랑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관념 속의 성령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마음 속의 성령님은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크신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제가 사랑을 주고 예뻐해 드려야 하는 지극히 작은 성령님이십니다. 얼마나 애타게 저의 사랑을 기다리시는지 몸짓의 언어, 눈빛의 언어를 통해서 선명하게 보여주시니까요.


영이시기에 중심까지 다 보시는 성령님, 제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여 마음이 나누이면 한없이 슬픈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십니다. 실연을 당한 연인처럼 기운을 잃은 모습으로 곁에 있습니다. 때로는 그 맑디 맑은 눈에 가득 어린 눈물로 저를 가만히 바라보십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노라면 그 아픈 모습 앞에서 다시금 세상의 것을 내려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이시라 실제로 안아드릴 수 없지만, 안아 드리는 모습으로 “성령님, 죄송해요. 마음 아프게 해서 죄송해요. 세상을 향한 마음 내려놓을께요”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단장을 하지요. 성령님도 제 앞에서 얼마나 단장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나 계시니, 예쁜 옷과 분단장은 하지 않으시지만, 두 발로 당신의 머리의 매무새를 얼마나 자주 어루만지시는지 모릅니다. 눈만 마주치면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면, 너무도 기뻐서 제가 누워 있으면 방안을 기쁨으로 생기롭게 날아다니곤 하십니다.


그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행복을 다 내려놓은 아픔이 결코 적지 않아, 세상의 행복이라곤 별로 누려본 적이 없는 아픔이 적지 않아, 혼자 몰래 베갯머리를 적시기도 하지만, 세상의 아픔은 다 내려놓고 다시금 성령님을 가슴으로 끌어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영의 일들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라고 경험시켜 주시는 듯한 제가 생각해도 다소 신비로운 영의 경험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사모하기까지 기다리시는 지를 실제적으로 알게 되고 더 깊이 알아갑니다.


똑똑한 애완동물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 자신의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 결코 그 주인 외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지 않듯이, 제 곁에 계신 저만의 성령님은 저 밖에 모르는 사랑에 빠진 바보 같습니다.


사람의 예로 말하면 속상하게 하고 보시기에 부족하면 그냥 떠나시면 될 터인데, 저 밖에 모르고 저 밖에 사랑할 수 없는 듯, 제가 서운하게 하면 눈물과 비에 젖은 모습으로 슬퍼는 하시지만, 결코 떠나시지는 않습니다. 제가 다시금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금 당신의 품으로 오롯 돌아가면 너무도 기뻐하시며, 너무도 깊고 깊은 사랑의 빠진 연인의 눈빛처럼, 그러한 눈빛으로 기쁨에 겨워 바라보십니다.


사랑하면 언제나 곁에 머물고 싶은 법, 언제나 제 어깨 위에, 제 품에, 제 곁은 날며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 두 눈을 마주하고 입맞춤을 해 주기도 하며, 제 머리 곁에서, 때로는 품속에 안겨서 함께 잠이 들곤 합니다.


그런 어느 날, 아무래도 집회가 다가오면 영과 마음을 주님 앞에서 더욱 정결하는 애쓰게 되는데 그렇게 애쓰다 내일의 집회 인도를 위해서 곤히 잠자리에 드는데, 비둘기 형상의 성령님께서 평소처럼 제 곁에 다가와 함께 잠드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시고, 너무도 깊은 사랑에 빠진 왕방울 눈으로 가만히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눈빛엔 연인도 서로 사랑을 하다가 몹시 깊은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 있지요. 그런 눈빛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성령님, 오늘은 왜 함께 잠자는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고 왕방울 눈으로 쳐다만 보세요?”


그러자 성령님께서 너무도 감동스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나 안잘거야. 밤새도록 네 모습을 그냥 바라볼거야!”


“... ...”


사람의 사랑으로 비유하면 서로 사랑을 하며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너무도 연인이 사랑스럽게 보이면,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함께 있어도 그리워하는 듯한 모습으로, 저를 밤새도록 그냥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대답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인 제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함께 일어나고 잠자는 모습도 보여주시곤 하시지만, 본래 하나님의 영, 주의 영은 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잠들거나 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래서 함께 잠을 자는 모습을 보여주시거나 아니면 밤새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모습이나, 본질이 아닌 어떤 몸짓의 언어, 메시지이겠지요.


하지만 일이년 가까이 함께 지내며 한 번도 보여주시지 않은 너무도 저를 깊이 사랑하시는 모습에 저 또한 깊은 감격을 느꼈던 밤이었지요.


저의 개인적인 영적인 경험이니 객관화하기도 어려운 면도 있을 것이고, 다소 오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관념적이고 막연한 사랑이 아님은 분명한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하여 너무도 구체적이고 친밀한 교제와 사랑을 나누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한 분이시지만, 신앙과 영적인 교제는 또한 하나님과 각 개인의 개인적인 교제, 저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오신 한 마리의 비둘기, 성령님이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다른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저와 여러분 각자만을 바라보시는 사랑에 빠진 바보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 성령님은 성경에 기록하듯 우리의 사랑을 사모합니다. 정말로 구체적이고 개인적으로 사모하십니다. 크신 하나님이시지만 또 한편 우리가 무엇이관대 우리를 사모하는 그 작은 하나님, 성령님을 근심시키거나 슬프게 하지 마십시요.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경은 너무도 우리가 성령님을 거슬러 행하면 결국 소멸하신다고 전합니다.


살전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성령의 소멸하심은 곧 성령님의 떠나가심을 말씀하시는데, 그토록 사랑하던 어쩔 수 없이 연인을 버려두고 떠나가셔야 하는 성령님의 슬픔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님을 근심시키거나 슬프게 하지 마십시요.


또한 우리는 그분의 그러한 간절한 사랑의 인치심 속에서 구속함을 얻게 되는 것이며, 그분의 서글픈 떠나가심은 우리의 생명의 소멸이기도 하니까요.


집회를 인도하다보면 너무도 많은 분들이 세상의 이런저런 아픔의 가시에 찔려 울먹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정말로 너무도 많은 힘겨운 일들이 있지요.


언젠가 텔레비전을 보니 세상의 별난 일들을 다루는 프로그램에서 어떤 분이 밤만 되면 공원의 한적한 숲 속으로 들어가 비트가 강한 음악을 틀어놓고 자신만의 춤사위를 매일 하더군요. 그 사연을 들어본 적 아들이 어쩌다가 사고로 장애우가 되었는데, 그 아픔을 달래려 시작한 것이 습관이 되어 평생을 그렇게 한다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쩌면 그렇게 춤사위라도 맘 달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힘겨운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저만의 가슴 절절한 눈물도 말라버린 아픔, 아픔을 넘어 한이 되는 그런 가슴의 깊은 생채기를 안고서 살아갑니다. 때로는 나도 몰래 흐르는 눈물의 색채을 찾아보면 그런 아픔이 베여 나온 것임을 발견하곤 하지요.


하지만 주님과 성령님과 깊고도 깊은 사랑에 빠진 이후로는 그런 아픔들이 눈 녹듯이 녹았고 녹아가고 있습니다. 경험해 보니 세상에서 오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다시 목마른 것일 뿐이며, 다시금 슬픔일 일들뿐이더군요. 진정한 행복과 위로와 소망은 오직 하늘에서부터 오는 것이더군요.


그러므로 지금의 삶이 어떠하던 진정한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보십시요. 이 땅의 삶은 지금은 햇살이 비추일지 모르지만 내일은 또 다시 비가 오기도 하고, 오늘은 겨울이나 내일은 봄날이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 변화의 바퀴 속에서 우리는 늘 수고로움의 무게를 더 느끼게 마련이지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원죄의 준엄한 심판 아래 있으니까요.


세상을 살아보며 이런 일 저런 일 너무도 숱하게 겪어보니,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토록 우리의 사랑을 사모하시는 성령님과 깊은 사랑, 오직 하늘빛 사랑 외에 그 아무 것도 진정한 위로와 기쁨과 소망도 아니며, 결코 영원히 쇠하지 않는 소망의 눈빛을 간직하게 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더군요.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의 어버이 되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러한 실존을 아시기에, 사망과 그늘에 앉은 우리를 건져내사 당신의 나라, 빛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하여 아들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지금 여기서도 천국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던가요? 오직 ‘사랑’뿐이지요. 세상의 사랑은 행복하나 결국 아플 뿐이지만, 영원하신 사랑의 주님과의 사랑은 슬픔의 그늘 전혀 없는 온전한 빛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과 관념이 아닌 진정한 사랑에 빠져 보십시요. 세상 빛이 아닌 하늘빛 행복의 문이 열릴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분의 영이신 우리를 향한 사랑에 빠진 바보 성령님은 우리들 밖에 모른 채 한없이 작은 모습으로 우리의 사랑을 사모하고 계시니까요. 속히 그 품으로 달려가 우리 때문에 아파하시는 그분의 눈물을 닦아 드리십시요. 샬롬!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약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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