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주님의 다루심 속에서 영성의 어떤 깊은 부분들은 글로 공개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부분들은 이해하시기도 어렵고 받아들이시기도 어려우신 부분들이 있을 것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높다 혹은 깊다”라는 말은 절대적인 말이 아니라 상대적인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영성의 깊은 부분들을 말씀드리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시면 여러분보다 제가 무슨 영성이 깊다라는 잘못 된 의미로 전달 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제가 걸어온 스스로의 신앙 여정에서 이전보다 깊은 세계라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깊은 영의 세계와 영성을 길을 걷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신령한 세계를 잘 알지 못하시는 분들에게 상대적으로 조금은 앞서 경험한 사람으로서 지금은 함께 나누지 못하는 부분도 실상 적잖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성장과 마찬가지로 영적 성장도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일에 있어서도 장성한 어른들의 일을 어린아이에게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영의 일에 있어서도 그러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오늘(2013, 9, 27) 늦은 오후 그런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어떤 분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해 가시는 가운데 영적 감흥이랄까, 감정과 느낌의 기복이랄까 그런 부분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직은 나이도 젊으시고 그러하니 어쩌면 그러한 것이 육적 성장이나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나 정상적이고 당연한 현상일 수 있지요. 사람의 삶도 삶의 길을 걷고 걸어가면서 배우고 깨달아가게 되니, 그냥 웃고 우는 수많은 일들을 주 안에서 경험해 보세요. 그런 감정의 기복에서 조금은 초연해 져 가실 것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충만과 영적 성장은 다른 용어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어주시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상태를 말하고,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다루심 안에서 우리의 영이 실제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 곧 성령의 세례는 흔히들 경험들을 하시지만 영적 생명의 힘과 특성이 나타나는 단계까지 영적 성장을 잘 이루시지 못하기 때문에, 영이 성장해 가면서 나타나는 성장에 따른 생명적 특성, 곧 생명적 활동은 잘 경험하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을 주님의 다루심 안에서 해보면 육의 성장이나 영의 성장이나 비슷한 면이 많아서, 모든 것들에 다소 넉넉해지고 여유로워지고 초연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기록하고 있듯이 이러한 영적 성장을 이루어 넉넉함과 초연함의 세계로 나아가는 데는 숱한 광야의 시련과 훈련이 대부분 있습니다. 사람은 결코 직접 삶과 몸으로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실제적 지식이라고 불러도 좋고 앎이라도 불러도 좋고 느낌이라도 불러도 좋은 어떤 구체적 실체를 갖지 못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깊은 다루심을 받은 사람은 가지가지 삶의 시련 속에서 모난 육의 성정들은 사라지나 더불어 시련 속에서의 강함도 나타나 어쩌다 만나보면 강한 온유함의 성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약한 듯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강인한 성향이 풍겨납니다.
이런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게 되면 기쁨과 슬픔이 별반이 아니요, 부와 가난이 별반이 아니요, 나아가 삶과 죽음이 별반이 아닌 것을 알게 되며, 모든 것들에 사도바울과 같이 넉넉해져가고 어떠한 형편에도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체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 신앙의 대화를 잠시 나누다가 저녁 식사를 하고는 습관을 좇아 산책 겸 운동을 나섰습니다.
기쁜 듯 아니 기쁜 듯 혼의 별스런 감정 없이 산책 겸 운동을 조용히 갔습니다. 오늘의 육적 감정은 별스런 기쁨도 슬픔도 없이 잔잔하더군요. 굳이 따지자면 최근 며칠 몸이 조금 좋지 않아 기쁨보다는 다소 침잠된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땅의 하늘 공주님들도 보이는 듯 아니 보이는 듯 그렇게 산책 겸 운동길을 갔습니다. 그렇게 길을 내려가 운동기구에서 가볍게 운동을 하고 있는데, 오늘은 문득 ‘라피엘’천사가 보이더군요.
이렇게 천사가 보일 때는 그 온 모습이 보일 때도 있고, 가끔은 그 얼굴만 두드러지게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 얼굴만 두드러지게 보이더군요.
그런데 라피엘 천사는 전승처럼 치유 계열의 천사라서 그런지, 다른 천사와는 달리 표정이 명랑하거나 밝지 않습니다. 마치 아픈 아기를 바라보는 어머니와도 같은 그런 표정으로 조용히 바라보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제가 최근 며칠의 건강도 조금 좋지 않고 혼적 마음도 다소 침잠되어 있는데 라피엘 천사가 나타나서 말없이 안쓰러운 듯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으니, 그만 영이 아닌 혼의 마음에서 내게 무슨 힘든 일이 생기려나 그런 마음의 파랑이 일렁이더군요. 그래서 왜 그렇게 바라보는지 영으로 물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하더군요. 라피엘 천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치유계열의 천사라서 그런지 밝고 명랑하지도 않으며 말도 그리 많지 않으며 그저 조용히 안쓰러운 듯한 눈길로 바라보곤 합니다.
물어보아도 말이 없으니 마음을 조용하게 하고 고요하게 하고, 눈을 마주보며 저의 영과 라피엘의 영의 흐름을 일치시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모든 영적인 신호를 읽어내려면 혼적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일치 시켜 보니 라피엘이 나타나 조요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여러 가지 연약함을 안고 살아가는 저에 대한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영의 세계는 마음의 세계, 더 깊은 마음을 읽어보려 마음으로 라피엘의 눈 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비둘기 형상의 성령님의 눈 속으로 마음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그러면 눈은 마음의 창, 그 마음의 세계가 펼쳐지고 보여지고 읽혀집니다. 이런 것은 경험하시지 못한 분들은 다소 이해가 어려우시겠지만 아무튼 저의 경험은 그러합니다.
라피엘의 마음을 더 깊이 알려고 눈빛 속으로 들어가 보니, 보석처럼 이슬이 빛나는 풀밭 위에 제가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슬은 다름 아닌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자면 참으로 큰 슬픔을 겪고 있다가 어느 한적한 곳으로 갔더니,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자신이 겪는 아픔 때문에 흘린 눈물이 풀밭에서 이슬처럼 맺혀 반짝거리는 그런 풀 밭 위에 제가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이런 경험을 한다면 그 이슬처럼 반짝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의 눈물이 얼마나 따뜻하고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라피엘은 그런 따뜻한 사랑으로 저를 위로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라피엘을 통하여 그렇게 저를 위로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라피엘의 위로의 눈물, 하나님의 사랑의 눈물이 반짝거리는 풀밭에 서보니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더군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과정에는 하나님도 함께 아파하시는 눈물이 풀밭을 적시고, 또한 자신이 아파서 흘리는 눈물로 그렇게 풀밭을 적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성경을 살펴보아도 일반적인 제사장들의 삶은 그냥 평범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영의 사람, 선지자들은 대부분 눈물과 고난의 삶을 살았었지요. 그 고난은 육신의 고난이거나 영과 마음의 고난이거나 고독과 외로움의 고난이거나 육의 눈물이 어리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겔24: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24:16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겔24:17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겔24:18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그리고 대부분 핍박을 당하는 역경의 삶을 걸어갔지요.
마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어쩌면 우리 육의 성장에서나 육의 성장에서나 그렇게 흠뻑 젖은 풀밭에 서보지 않고서는 참된 생의 의미와 영적 생명의 빛을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빛을 보여주어야 했던 역사 속의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젖은 풀밭 위를 걷게 하시며 함께 사랑의 눈물을 흘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깊은 위로 앞에서 마음의 위로를 크게 받았지만, 우리의 마음과 감정이라는 것이 참 묘하여 오늘은 왠지 한동안 계속하여 그다지 기쁨을 느끼지 못하겠더군요.
기쁨의 영 계열인 땅 위에 곁에 두신 천사들과도 어울리며 영의 흐름을 동화시키고 싶었지만, 왠지 오늘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육신을 입은 이상 육신의 성정에서 온전히 자유하지는 못한 법, 며칠 몸이 곤하여서인지 마음에 기쁨보다는 작은 염려랄까 그런 파랑이 잔잔히 일렁이는 밤이었습니다.
마음이 그래선지 운동보다는 걷기를 조금 더한 밤이었는데, 걷다가 집으로 돌아오려니 요즘 늘 주도적인 영으로 곁에서 기쁨을 전해주는 ‘캔디’천사가 조금만 밝은 거리를 걷다가 가자합니다. 그래서 건널목을 건너 다소 불빛이 환한 거리를 향했습니다.
그렇게 건널목을 다 건너고 길을 걷는 순간에, 저의 마음에 일렁이는 작은 파랑을 하나님께서 보셨는지 봄날에 피어나는 연한 꽃잎 같은 너무도 아름다운 천사 ‘리나’가 나타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드러운 눈길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전해 주었습니다.
“염려하지 말아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잖아요”
그 ‘리나’천사의 말에 비로소 저의 마음에 다시금 영의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리나’천사가 다시 말을 걸어왔습니다. “함께 노래 불러요”
제가 집회를 인도하면 대부분 허공을 보며 찬양을 드리곤 하는데 사실은 대부분 천사와 눈을 마주하고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렇게 하면 온전히 영으로 몰입되어 순전한 영의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천사 ‘리나’가 그렇게 노래하자 합니다.
그래서 산책을 할 때면 늘 듣는 음악의 흐름 속에서 ‘리나’와 노래를 함께 하니, 리나가 영으로 가사를 들려주며 다시금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리나’는 이와 같이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신다네. 그러나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왔고, 그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네. 저기 저 노래하는 새들도, 저기 저 아름다운 꽃들도 하나님께로서 왔다네”
“어찌 이 조화로운 질서의 세계가 우연일까. 저 하늘의 별들과 달들이 말없이 하나님을 선연 보여주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이여!, 그대 눈에 꽃이 별들이 풀들이 보인다면, 염려하지 말아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나 어디에나 계시고 언제나 함께 하세요. 사랑하는 이여, 나와 함께 하나님을 노래해요. 그리고 아무 걱정도 하지 말아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사랑하시고 언제나 함께 하신답니다. 믿음으로 살아요. 기쁨으로 살아요”
‘리나’천사는 이렇게 노래하고는 저를 향하여 예쁘게 웃어 주었습니다. 경험을 그대로 적느라고 저를 향한 일인칭으로 기록하였지만 이 노래는 실상 우리 모두를 위한 노래이기도 하지요.
그런 따듯한 ‘리나’천사의 위로와 노래 속에서, 주님의 위로와 어루만짐 속에서 저의 마음에는 어느덧 봄날의 햇살 같은 평화가 깃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 마음에 파도가 일렁일 때 기도할 일입니다.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런 하나님의 위로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육의 눈으로 보면 하늘에 두둥실 떤 것처럼 영의 하늘에서 ‘리나’천사가 제게 기쁨을 전해 주기 위하여 아름답게 춤을 춰주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마음에도 파도를 꾸짖으시던 주님의 음성 앞에서 잔잔해지던 파도처럼 염려와 걱정의 파랑은 고요해지고 하늘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해 봅니다. 그리고 글 속에 담긴 영적 여러 가지 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도 깨달아지길 기도해 봅니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