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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이야기] 소나기

초록 등불 2014. 7. 10. 00:29

 

  

  [천사 이야기] 소 나 기

 

올해는 다소 늦어졌지만 이제 장마가 시작되고 비가 오려나 봅니다. 성경과 우리의 삶의 자리를 보면 물은 우리 생명체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강이나 바다 그리고 비와 같은 물을 본성적으로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선지 제게도 지난 날 살아온 많은 기억들 중 대부분은 잊혀졌는데 비에 관련된 몇 몇 기억들은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옷이 젖거나 말거나 망아지처럼 친구들과 뛰놀던 모습, 마루에 앉아서 처마 끝을 경계 삼아 내리던 비를 가만히 바라보던 모습, 방의 뒷문을 열어 놓고 내리는 비와 빗소리를 보고 들으며 비가 전해주는 자연의 감성에 젖어보던 기억들, 이런저런 기억들이 어제 일처럼 생각납니다.


어제인지 그제인지 오후에 운동겸 산책을 나가니 더운 여름 햇살에 들국화들도 지친 모습으로 하얀 꽃들을 힘겹게 두 손으로 떠 받쳐 이고 서 있더군요. 비라도 한 자락 시원하게 내려주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 삶도 한편 힘겨움이 적지 않다 보니, 힘들어 보이는 들국화가 마치 나 같기도 하고 마음 한 편에서는 이 땅의 걸어야 할 소명의 길 속히 다 걷고 저 풀들과 꽃들 사이에 누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나 그것은 생물학적인 본능이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참 복과 참 쉼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계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제가 목회자로 살아보니 목회자에겐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사람들과 육적 혼적인 정과 감정의 관계 형성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영적인 마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하지 아니하고 육적인 마음과 감정으로 관계성을 갖게 되면 반드시 상처를 주거나 받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것이란 변하고 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의 힘겨움을 아픔을 다독여 주고 용기를 전해주는 사람이지 사람들로부터 위로받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이 다루시는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도 사람인지라 때로 사람들의 위로가 그리울 때도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위로, 하늘만 바라보려 애를 씁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은 의지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과 용서의 대상일 뿐입니다.


요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2: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이끄시는 영적 성향이 ‘영적 피정의 고독한 영성’이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려고 집에 덩그마니 홀로 남겨둔 아이처럼 지내게 하시니, 흐르는 몇 여년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그러한 생활에 익숙해져 갑니다.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이러한 ‘고독한 영성’으로 이끄시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과 쉽게 어울릴 수 없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 홀로 지내게 되어 가고, 또 주님께서 환경을 그렇게 만드셔서 혼자 지내게 되는 면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떠나 홀로 지내게 하심은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땅이 아닌 하늘, 곧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려 하심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한편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세상을 질투하여 우리를 당신의 품에 더 머물게 하기 원하십니다. 사랑이 깊은 만큼 질투도 깊은 법입니다.


그렇게 달과 달을 지나고 년과 년을 지나다 보니 집안에 홀로 남겨진 아이가 친구가 없어도 혼자 놀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 지내듯이, 영적으로는 기도와 말씀 등이 혼자의 지냄의 일들이요, 육으로는 조용히 산책을 하거나 좋은 음악을 듣거나 등이 저만의 놀이가 됩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가 외로워 개미나 풀 등을 친구로 삼아 노는 아이 같습니다.


영성이 발현되고 그 속에서 세상의 궁극을 알아버리고 나면 보이고 만져지나 세상에는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 없는 것처럼 외롭고 힘겨워도 세상에는 갈 곳도 머물 곳도 없음이 실제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별로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덧입고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는 하늘은 ‘아미’이나 그러나 ‘아직’인 온전히 성취되지 않음의 속성 속에서 하늘을 품고 살아가는 삶에는 한편 거룩한 애달픔이 있습니다. 한편 쓸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집안에 홀로 남겨진 아이처럼 하늘만 벗 삼아 지내니 하늘의 문도 열어 보여 주시고, 영으로 주님이 찾아오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천사들을 통하여 위로해 주시기도 하시지만, 아직은 환상처럼만 보여지는 그 세계, 그리고 육체의 힘겨움을 다 안고 살아가는 천로역정의 시간 마음 한편은 늘 수고롭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어느 맘 힘든 하룻밤, 잠을 자려고 하니 ‘청이’가 제법 위로해 줍니다. 모습은 아들 같은 소년의 모습이지만 영적 존재이니 저보다 훨씬 앞선 연장자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땅은 멀어지고 하늘이 가까운 지금의 생활, 가끔은 ‘청이’ 등의 천사들에게 사람의 일로 비유하면 아기처럼 ‘옹알이’를 하며 힘겨움을 풀어놓기도 합니다. 땅은 저 멀리 두시니 주님의 사랑으로 곁에 두신 하늘의 손길, 천사들에게 투정을 부립니다. 그러면 대부분 다 받아주며 위로해 주곤 합니다.


천사들은 주님이 보내신 영이요, 그런 의미에서 한편 주님의 마음이요 한편 주님 그 자신이니까요.


최근엔 좋지 않은 몸의 상태가 다소 오래 갑니다. 이런 때는 저도 사람인지라 염려와 불안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엘리야도 그랬듯 우리는 때로 강해 보여도 다 연약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 하룻밤 다소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아 조금은 평안을 잃고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는데 깊은 밤 잠시 눈을 떴습니다. 아직 잠이 들 깬 반 무의식의 어두운 방 가운데 곁의 ‘청이’와 하늘의 한 천사가 하얗게 어슴푸레 보입니다. 아무리 천사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제가 좀 놀라기도 합니다.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은 사람이 아닌 영이 곁에 있으니 자다가 깬 이런 경우 조금 놀라기도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조금 누워 있노라니 하얀 모습의 하늘의 ‘린’ 천사가 마치 어린 아이를 엄마가 다루듯 저의 위에서 눈과 눈을 마주하고 조용히 보았습니다. 제가 ‘린’이라고 이름 지은 천사와 ‘리나’라고 이름을 지어준 천사는 생김새가 조금 비슷한데 언니와 동생 같습니다. 언니의 느낌이 ‘린’입니다.


사람이나 영이나 함께 오래 지내면 편해지는 법, 제가 편하게 물어 보았습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사랑하니까” 그렇게 대답하며 선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하늘의 평안과 사랑을 전해 줍니다. 캄캄한 밤이지만 영으로 보는 영의 시공은 가을하늘처럼 맑기만 하고 천사의 눈빛은 램프처럼 보석처럼 밝은 빛을 냅니다.


제가 경험하고 자료를 살피니 영의 세계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을 그래도 교감하며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된 통로가 눈입니다. 말을 나눌 수 있지만 그것은 표현의 형식일 뿐 말이 없어도 서로의 마음과 뜻을 다 압니다.


늘 곁에 보이며 함께 하며 천사인 줄은 알지만 저 깊은 정체성은 잘 모르는 상태 그래서 그냥 별스런 의미 없이 “그런데 넌 누구니?”라고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제 곁의 천사들은 보통 일상적인 하나님의 음성 수준의 뜻과 말만 전하지 깊음의 세계는 잘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제 질문과는 관계없이 “힘내고 용기 잃지 말아요”라고 하늘 용기만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오늘의 날씨가 다소 좋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주의 영이나 천사들의 영이나 영들은 수정 유리알 같은 눈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으니 눈동자가 신기한 유리 구슬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잠시 누워 있으니 천사가 알려준 대로 창가에서 후두둑 빗소리가 조용히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빗소리가 들려오니 어릴 적 비를 맞으며 좋아하던 고향이 그립고, 답답하면 가끔 찾던 시원한 바닷바람을 안고 푸른 눈빛과 큰 가슴으로 언제나 맞아주던 고향 바닷가가 그리웠습니다. 이제는 타향이 되어가지만 어릴적 제 고향 바닷가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편 그렇듯이 몸도 맘도 삶도 한편 수고로우니 “요즘 조금 마음이 답답하네. 마음을 시원하게 할 방법이 없을까?”라고 눈과 코를 맞대로 저를 바라보는 ‘린’에게 물으니 ‘린’천사가 대답해 줍니다.


“그럴 땐 성경을 읽어요”


‘린’의 말을 듣고 보니 영원의 본성을 가진 우리에게 땅의 그 무엇이 답답함을 풀어줄 수 있을까. 오직 영원의 창일한 바다와도 같은 하나님의 빛의 세계, 말씀의 세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린, 네 말이 맞다”


‘린’의 말에 동감하며 고향의 푸른 바닷가 같은 말씀의 생명수의 강 곁에 마음을 주며 조용히 앉아 있어 보았습니다. 성경 속의 몇 말씀을 가슴에 담아 보았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 말씀 속에 그리고 곁에 잠시 앉아 있노라니 여름 따가운 햇살아래 다소 지친 모습으로 피어있던 들국화 같은 제 마음에 단비의 소낙비가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다소 답답하던 방의 창문을 여니 창문으로 시원한 강바람, 산바람,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도 삶의 수고로운 햇살 아래 가끔 지치십니까. 그렇다면 끝없이 푸르른 하늘같은 영생과 영원이신 하나님의 빛, 그 빛이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으십시오. 그곳에 참 쉼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하늘의 강, 생명의 강이 있습니다.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하늘의 샘, 생명의 샘이 있습니다. 샬롬



계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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