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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이야기] 십자가의 자유

초록 등불 2014. 11. 18. 12:29

 

   

  [천사 이야기] 십자가의 자유

 

이번 2기 40회차 집회(2014.11.15.)는 이런저런 면에서 제 마음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습니다. 마냥 숫자를 늘려가는 것보다는 고난, 훈련, 연단을 상징하는 40회로 나누어 진행함이 마음의 새로움에도 좋을 것 같아, 진행해온 한 달에 두어 번 가량의 집회, 어느덧 두 번의 만수가 되었으니 80회, 대략 3여년의 시간이 지난 것 같습니다.


규모가 어떠했던 열매가 어떠했던 돌아보면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시간들을 주님의 붙드심과 은혜 안에서 잘 마쳤으니 제 스스로 주님 안에서 감사함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슴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2기 40회차 집회는 개인적으로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평소의 집회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다른 그 무엇 때문에 평소와는 다르게 집회를 준비하는 시간 동안에도 소리 없이 눈물도 없이 조용히 혼자 속울음을 몇 번 삼켰고, 집회를 인도하는 날도 잠시 속울음을 삼켰습니다.


사실 이번 40회차 집회는 진행여부를 놓고 혼자 많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몸이 좋지 않았으니까요.


몸이 아픈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의 경우는 잘 먹지를 못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니 체력의 문제이라 잘 생각하고 바른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픈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이것은 참으면 되지만, 잘 먹지 못하여 기운이 없는 경우는 활동 자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만의 문제이면 상관없지만 하루라는 시간을 따로 내어서 대부분 참석하시거나 때로는 오가는 시간이 종일의 거리를 마다않고 사모하여 참석하시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집회가 진행되면 그래도 나름 알차고 은혜롭게 잘 진행되어야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몸은 여전히 좋지 않고 기운은 없어서 한 동안 쉼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소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집회를 쉬려고 마음을 그렇게 정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 동안은 주님도 저의 이러한 사정을 아셨는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데 이번 날짜에는 집회를 인도하여야 한다는 그러한 주님의 감동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적은 그런 이유들과 영으로 오는 것들은 잘 분별하여야 하기에 그리고 시간과 날짜가 있기에 다소 공지를 미루며 신중하게 분별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하루 운동겸 산책을 나갔습니다. 성격이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편이라 조용한 숲에 마련된 곳을 찾아 산책겸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용한 곳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조용한 가운데 하늘 공중 걷기 운동기구를 걸으며 운동을 하고 있는데, 흰옷을 입은 사람이 갑자기 보였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 사람이 갑자기 언 듯 보이니 조금은 놀랐지요.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사람이 아닌 영으로 오신 주님이셨습니다. 늘 곁에 함께 계시지만 그렇게 뚜렷하게 나타나시는 경우는 주도적인 영, 주인공의 영으로 나타나시는 경우입니다.


천사의 영이나 주님의 영이나 어떤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주도적인 영으로 나타날 때는 무대에서 그 배우만 조명을 받는 듯 다른 영들에 비하여 뚜렷하게 각인되어 보이고 나타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다른 천사 이야기 ‘강하고 담대하라’에 함께 경험한 것이지만, 이 주제는 따로 글을 적어야 하겠기에 그 부분만을 새롭게 적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도적인 영으로 찾아오신 주님은 몸의 힘겨움으로 다소 마음도 약해진 저에게 그 눈빛으로 옛 믿음의 선조들이 사람이 능히 감당하지 못할 상황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했던 것처럼 그럴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근거인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눈빛으로 전해 주셨습니다.


히11: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런 주님의 깊은 영생수의 우물 같은 눈빛을 바라보면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지만 정말 생명이 무엇이고 영생이 무엇인지를 영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눈빛으로 “이번에는 집회를 인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같았습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주님의 음성, 특별히 실제적인 문제를 다룰 때는 분별이라는 신중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듯한 주님 앞에 저의 상황과 마음을 살짝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 지금 제 몸이 ..”


그렇게 말하다가 주님을 바라보고는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잇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말없는 조용한 눈빛으로 간단히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나도 힘들었다..”


주님은 그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셨는데 제 영 안에서는 스스로 수많은 음성들이 들려왔습니다.


“나도 힘들었다. 사역의 기간 동안 여행자처럼 편한 잠자리나 먹을 곳이나 쉴 곳도 없었으며 늘 걸어 다니며 피곤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핍박과 조롱을 당하였으며..”


그런데 정작 제게 속울음을 삼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제 영 안에서 스스로 들려오는 주님의 편에서 생각해 보는 음성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생각이었습니다.


“주님도 한편 사람이셨는데 얼마나 십자가는 지기 싫으셨을까.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으셨을까..”


왜냐하면 몸이 힘드니까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힘이 드니 어쩌면 기력이 회복될 때까지라도 제게 집회는 피하고 싶고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그런 힘겨움에 피하고 싶은 마음에 십자가를 오르셔야 하셨을 당시 사람으로서는 본성적인 주님의 어쩌면 피하시고 싶으셨을 마음이 비추어져 오니 저에 비하여 너무도 크셨을 그 다가오는 주님의 고뇌의 마음이 속울음을 삼키게 하였습니다.


성경의 면면에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이신 예수님의 고뇌를 엿볼 수 있습니다.


눅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마26: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을 보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마치고 계시지만 극한의 고통을 앞에 두신 한편 인간이신 예수님의 고뇌가 또한 묻어나는 기도이지요.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는 인간이셨던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당신의 마음을 말씀하시기도 하셨지요.


마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도 힘들었다..”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눈동자와 함께 지나가면서 제 스스로 안에서 일어나는 음성,


“주님도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사람이셨으니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피하고 싶으셨을까..” 라는 생각에 제 마음이 걸리자 제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생각에 그 자리에서도 주님의 수고로움에 대한 생각과 저의 수고로움이 엮이어 속울음이 한번 시큰하게 가을 숲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아무런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시간 이후 주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래도 잘 분별하여야 하는 것이 영적인 세계의 일이기에 주님의 뜻과 마음을 종용히 분별하고 살피며 조금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주님도 그런 저의 신중함을 배려하셨는지 급하게 종용하지는 않으셨지만, 늘 주도적인 영으로 곁에서 눈빛과 모습과 영으로 이번에는 집회를 인도할 것을 전하셨습니다. 이런 경우는 영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거나 영의 눈으로 본다는 것과는 다르게 그냥 온 우주에서 영의 오감을 통하여 들려오는 듯하고 온 몸의 세포로 그 뜻이 전해져 오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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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의 상황이 녹녹하지 않고 그러한 상황이 또 저만의 문제가 아닌 공적인 일이므로 신중히 분별하려고 갖는 시간, 그런 주님의 십자가 순종과 더불어 믿음의 조상인 우리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순종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같은 사람이셨던 주님도 얼마나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 싶으셨을까?”


“아브라함 조상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피하고 싶으셨을까? 다시 능히 살리실 수 있음을 믿었지만 그 마음은 얼마나 내키지 않았으며 힘겨웠을까? 아들이 아버지 모든 제사의 준비는 되어 있는데 정작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불칼과도 같은 음성으로 심장을 찔러올 때 아브라함 조상의 마음은 어땠을까?..”


참된 신앙의 길, 참된 믿음과 순종의 길이란 정말 쉽지 않은 깊음의 길이구나!


그러한 것들을 조용히 묵상하며 생각하며 이모저모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본 바 집회를 인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스스로 안에서 확증을 얻고 진행공지를 올렸습니다.


저의 순종의 차원을 올려 주시려는 주님의 행하심인지, 아니면 제 몸의 자연스런 현상인지, 아니면 순종을 방해하려는 사단의 역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순종을 결정하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더욱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내면에서 스스로 들려오는 음성, “인간이셨던 주님은 얼마나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을까?..”라는 음성 앞에는 그 어떤 힘겨운 조건도 저로 하여금 주님의 뜻 앞에 침묵하게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이유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영의 시큰한 눈물만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 몸으로 확증되어져 오는 주님의 뜻 앞에 순종하지 않고는 견딜 방법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많으니 저보다 힘겨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저는 평범한 건강을 누리는 사람들은 모르는 정말 힘겨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런 성령께서 심령에 매임을 주시니 순종만이 쉴 길이요, 쉼의 길이요, 그 길 뿐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바울이 그런 성령의 매임을 받아 자신에게 환난과 핍박이 기다림을 아나 그 좁을 길을 가지요.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권면하여 눈물로 가지말아 애소하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대답하지요. 이는 심령이 성령에 매인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행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이러한 것이 심령이 성령에 매인 바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에 그 심령을 메인 바 되어 보신 분들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는 성령께서 메인 그 길이 무엇이든지 순종하지 않으면 육신의 안락은 얻을지 모르지만 심령의 평안과 쉼은 한 시도 얻지 못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순종이나 아브라함의 위대한 순종이나 사도바울의 목숨을 건 순종에는 비견할 수 없는 작은 것이지만, 나름 작은 제게는 쉽지 만은 않았던 주님의 음성에의 순종, 성령께서 메신바 길에 두 팔을 벌려 버리고 항복하니 하늘이, 주님이 너무도 평안과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 때부터는 몸은 곤고하고 더 힘겨운 시간도 찾아오나 제 영은 평화를 누리고 안식을 누리고 쉼을 누리고 살 것만 같았습니다. 눈에 모래가 들어가서 불편한 것처럼 편하지 않던 성령에 매인 바 되었던 심령에는 고요한 평화와 안식이 깃들었습니다.


그리고 늘 주님의 모습을 영으로 뵈며 지내왔지만 그렇게 만족해하시며 평온해 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도 별로 보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제가 힘겹지만 여러 가지를 살펴 주님의 뜻이라 확정짓고 순종을 결정짓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바뀌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적은 그렇게 많지 않은데 주도적인 영으로 때로는 영의 아버지처럼, 때로는 영의 친구처럼, 때로는 영의 신랑처럼 친근하게 어울려 주셨습니다. 쉴거나 잠들 때 무릎 베게로 쉬게 하시며 쉼을 주시며 길을 걸을 때 함께 걸어 주시며 주도적인 영으로 한 동안 어울려 주셨습니다.


주도적인 영으로 오셔서 한동안 함께 하시는 주님의 그런 친근한 모습을 그리 많이 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번 집회는 다른 누군가와의 집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집회 일로 전화가 온 분하고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 집회는 다른 누군가의 참여가 중요한 집회가 아니라, 저와 주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렇게 집회 당일 날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니 소화기에 부담을 주지 않는 음료계통의 먹거리를 잘 준비하여 집회 준비를 마치고 강단에서 주님 앞에 앉아 있으니, 주님도 강단 의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집회를 인도하면 영으로 보면 늘 그곳에 좌정하고 계십니다. 저는 힘겨운데 주님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행복한 얼굴로 앉아 계셨습니다.


“작은 저의 순종이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고 기쁘게 해 드렸다면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과 함께 다시금 ‘주님은 얼마나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을까’라는 생각에 잠시 또 시큰한 영의 속울음이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앉아 있노라니 주님과 함께 있던 아이가 제게로 걸어왔습니다. 왠지는 모르지만 주님은 곧잘 어린 아이 모습의 영들과 함께 오십니다.


순동이 천사를 닮은 그보다는 더 어려 보이는 아이의 영은 육신의 어린 아이처럼 해맑은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눈빛에는 아직 어리고 순전하여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나아가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부모에게 맡기고 안식하는 순전한 안식과 순전한 쉼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게 그런 깨달음과 마음을 전해 주시려 그렇게 행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서 진행한 집회 많은 사람은 오시지 못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큰 무리 없이 잘 진행되고 잘 마쳐졌습니다. 저의 다소의 수고로움은 있었지만요.


영적으로 성장하여 가며 지혜로 하늘과 땅을 조금씩 살피면 세상의 일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 행하여져 갑니다. 자연이 하늘의 순리에 따라 변화하고 물이 하늘의 순리를 따라 흐르듯 세상의 모든 일들도 그러합니다.


그러한 이치를 깨달아 가면 보이는 것들에 조금씩 초연해 가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섭리와 관계를 보는 본성의 마음이 열려져 갑니다. 그리하면 보이는 것들로부터 자유함을 조금씩 누려가게 됩니다.


올 것은 오는 것이며 머물 것은 머물 것이며 가야할 것은 가는 것이 순리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오고 머무는 것만을 좋아하지요. 그러면 그 무엇이든 고이고 썩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도 말입니다.


그러한 본질을 보는 눈이 열려 가면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요, 뜻이요, 섭리입니다. 그것이 본질이니 제겐 주님이 기뻐하시는 시간이었으면 그것으로 많이 행복한 집회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집회와 같은 이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그리고 주님의 빛을 통하여 이 땅에서의 주님 안의 안식이란 육체적인 쉼과 편안함이 아닌, 도리어 고된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통한 쉼임을 알아갑니다. 곧 십자가를 통한 자유, 십자가를 통한 참된 쉼을 배워갑니다.


우리가 소를 기르면 어릴 적에는 송아지로 마냥 뛰놀게 그냥 두지만 성장하면 코뚜레를 채이고 점점 해야 할 일과 짐의 분량을 늘려가지요.


하지만 그렇게 소가 철이 들어가면 점점 주인의 뜻에 순종하는 안식을 알아 종일토록 고되게 일하고도 주인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며, 주인이 주는 꼴을 먹으며 감사하며 주인의 기뻐하는 모습에 행복해 하며 가끔씩 힘겨움은 ‘소울음 소리’를 내나 큰 눈망울엔 안식이 있지요.


우리의 신앙의 여정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우리가 장성하여 가면 일과 짐을 무게를 더하심은 그래야 훗날 하늘의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가득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십자가의 도를 깨닫는 마음이 있어, 진정한 기쁨의 순종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십자가 안에서 점점 더 깊은 안식과 쉼을 누려가는 우리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이미 성령에 매인 바 된 우리의 심령에 참된 자유와 안식과 쉼을 누리는 길이요, 그리 멀지 않은 훗날에 마주할 영원한 하늘의 영광의 기업을 쌓고 쌓는 별과 같은 생명의 삶입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짐이 아니라 자유와 쉼과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시기에 우리에게 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출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기독교 대한 감리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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