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수필

지옥은 있습니다 (2) - 상식과 직관편

초록 등불 2011. 4. 28. 17:16

 

※ 지옥은 있습니다(2)- 상식과 직관편 ※

 

 

 

개인적인 일들로 다소 자기 관리를 잘하지 못하고 조금 무리를 하였더니 엊그제부터 다소 몸이 곤하더군요. 사람은 육체를 덧입고 사는 법, 건강하지 못하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영의 강건함 관리이겠지만 육신의 건강관리도 잘 하시고, 또 건강할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과 섬김을 통하여 하늘의 상급 가득 쌓는 복된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교복이 있던 시절, 중학교 때 다리를 내어놓아야 하는 반바지 교복이 정말 싫었고, 친구들이 모기다리라고 놀려댈 만큼 어릴 적부터 체력적으로 연약함을 지니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며 살아와야 했지만, 어릴 적엔 체력을 딸려도 아프지 않으니 미래를 내어다보는 지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늦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가장 빠르다고 하지요.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하여 건강관리에 애쓰며, 또한 주님 앞에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으니 반드시 온전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건강뿐만 아니라 연단과 시련의 시간을 통하여 영적으로도 더욱 온전하게 세워주실 좋으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감사를 드리며 찬양을 올립니다.


사람들은 정작 당하지 않으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대부분 사는 것 같습니다. 건강으로 어려움을 겪어본 제가 다른 분들에게 건강관리 잘하라고 하면, 대부분 그냥 가볍게 듣고 지나치더군요. 정말 건강관리 잘 하십시요.


첫째는 마음이 평안함이 건강의 기본이니, 늘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순종과 진리의 삶을 살아가시고, 둘째는 뭇 사람들을 주 사랑 안에서 사랑하며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일들로 마음과 몸을 상하지 마시고, 셋째는 모든 몸을 이루는 것은 음식으로부터 시작되니 건강에 나쁘다는 음식들은 절제 하시고, 넷째는 무리하지 않는 절제되고 적절한 휴식으로 몸에 무리를 주지 마시고, 다섯째는 운동도 게을리 하지 마셔서 육체의 기능을 왕성하게 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건강에 관하여 “사람들은 정작 당하지 않으면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린 것과 같이,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에도 그러한 경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건강에 관하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육체의 아픔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뿐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간과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영과 육이 동시에 영원한 멸망으로 가게 되니 참으로 두렵고도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삶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지옥이 왜 존재하는지 상식과 직관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서 잠시 기도하니, “진정 지체님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글과 말씀을 기록하라” 이르시고, “너의 말과 글이 아닌 나(주님)의 가르치심에 유의하라” 명하시고, 나아가 “늘 말씀을 읽으며 기도로 네 마음 속에서 영적인 빛을 잃지 말라” 이르셨기에, 부족하나마 말씀 속에 주님의 사랑을 담아, 그리고 주님의 가르치심을 담아 적어보려 합니다. 명하시고 기록하게 하신 주님께서 저와 지체님들의 마음속에 빛과 생명을 누리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상식적으로 심판과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어떨까요? 이에 관하여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지요.


고전15: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상식적으로 죽음이 그 모든 것들의 끝이고 그 후에 심판이 없다면, 상급과 형벌이 없다면, 사도바울의 말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어쩌면 가장 지혜로운 삶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자기만족을 위하여 선을 행하며 살 수는 있겠지요.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또 한편 자기만족을 위하여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역사적으로 악독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뭇 사람을 학대하고 죽음으로 내어 몬 사람들도, 죽음이 모든 것들의 끝이라면 그들도 사도바울의 말처럼 어쩌면 현명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양심의 고통을 그들은 받지 않았겠습니까?”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듯 우리의 양심도 악에 악을 더하면 화인을 맞아서 감각이 무디어지고 나아가서는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가 생각하듯 악한 길을 마냥 걷는 사람이 늘 양심의 자책으로 고통당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믿음과 선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과 헌신으로 산 사람과, 자기 개인적인 욕망과 즐거움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의 결국이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같다면, 우리의 상식적으로도 이건 아니라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의 상식도 심판과 상급과 형벌, 곧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상식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직관이나 양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성경을 알던 모르던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자책하게 질책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무엇인가를 향한 두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도바울이 이와 같이 말씀하지요.


롬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롬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악한 일을 행하였을 때의 양심의 자책과 무엇인가 절대자를 향한 두려움은, 본성상 우리 속에 죽음 이후의 심판에 관하여 말없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이 범죄한 사람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반드시 대상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 느끼는 양심의 자책과 두려움은 누구를 향한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것은 말없이 절대자가 있음과 죽음 이후의 심판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 두려움은 절대자요, 창조주이시며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 본성의 두려움이요, 양심은 죽음 이후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이 우리 속에 본성상 심어 놓으신 경종의 종소리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이것은 선이다, 저것은 악이다”라고 느껴지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처럼 거리가 조금만 멀어도 생각의 교통이 쉽지 않았던 옛 시절, 각 지역에서 생겨난 많은 종교와 도덕적인 가르침은, 오늘날 살펴보면 윤리 도덕적으로 보면 놀랍게도 대부분 일치합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본성에 하나님께서 양심이라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느끼고 분별할 수 있는 기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물질계가 아닌 정신계에 속하는 선과 악의 분별, 선과 악의 분별의 축이 인간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나 우연히나 스스로 생겨났을까요? 어떻게 아주 거리가 멀어 서로 다른 환경과 영역에서 산 사람들이 같은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을 대부분 같게 되었을까요? 그것이 우연일까요? 자연적으로 생겨난 마음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본성에 하나님께서 양심이라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느끼고 분별할 수 있는 기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직관도 절대자의 존재와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영적 생명과 심판을 말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직관은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와는 다른 것으로 우리가 알다시피 영의 기능에 속하는 것입니다.


가령 이성과 논리는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린다거나 이웃을 구제하기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면, 수학적으로 빼기가 되니 가난해지고 궁색해 진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창조주께서 당신의 진리를 판단하게 우리 속에 넣어두신 영의 기능인 직관은 그렇게 할 때에 오히려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도리어 부해지고 축복을 받게 됨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하지요.


우리의 이성과 논리는 항상 경험되어진 것들만을 받아들입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셨다거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던가,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수 있다는 것과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수태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러한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후손의 이어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아버지가 계시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계실 것이고,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계실 것이고, 그렇게 마냥 나아가다가 그러면 처음의 사람은 누구지라는 논리와 이성의 벽에 부딪히자 진화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메바와 같은 원시생물이 분화하고 진화하여 사람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나아가 우주와 자연은 그냥 스스로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석학이라고 불리우는 호킹 박사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단지 물리학의 법칙뿐이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였지요. 물리학을 공부한 저로서는 한편 학문적인 뛰어남에 나름 존경하던 분이라 정말 그분의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현대 물리학의 수리 물리학적 어려운 학문을 꿰뚫고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는 세계적인 석학도, 우리가 보면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은, 이성과 논리의 세계는 단지 경험하고 보고 들은 것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호킹 박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물리학의 법칙이 존재하게 된 원인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궁극적인 질문 앞에서는 이성과 논리를 존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자연적으로, 스스로”라고 답을 하지요. 왜냐하면 경험에 바탕을 둔 이성과 논리의 한계는 거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어린아이에게 물어보십시요. “이 자연과 우주와 사람들이 그냥 생겨났을까? 누가 만드셨을까?” 대부분의 아이들은 “누가 만든 거 같아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아이들을 전도하면서 제가 수없이 겪어본 경험입니다.


왜 아이들은 그렇게 답을 할까요? 그것은 아직 마음이 순수하여 직관이 많이 발달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학문과 지식과 상식과 경험과 논리와 이성의 영역이 발달해가고 확장되어 갈수록 직관의 눈은 어두워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악과나무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요. 그것을 먹기 전에는 자신들이 벗은 것이 수치스럽다거나 상대방이 우습게 보인다거나 하는 그런 혼적 의식자체가 없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너무나 밝히 알고 그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먹음으로써 영은 죽음을 맞게 되고,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혼의 눈이 밝아져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나 영성과 직관의 기능은 쇠약해지고 죽음을 맞게 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대답해 보십시요. 이 우주와 만물과 사람과 자연이 그냥 스스로 생겨났거나 진화를 하였다고 느껴지십니까? 머리는 생각합니다. 가슴은 느낍니다. 혼의 이성과 논리는 머리로 생각하지만, 영의 직관은 가슴으로 느낍니다. 자, 여러분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답해 보십시요. 생각이 아닌 느낌을 말해 보십시요.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로마서 1장의 사도바울의 말처럼, 저 가슴 깊은 곳에서 “만물을 창조되었다”라고 외치는 영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지식이나 논리가 아닌 직관의 기능에 해당하는 지혜를 가진 자가 생명을 얻게 된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잠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와 만물은 그냥 우연히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저 태양이 지구와 조금만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만 져도 우리는 더워서 죽거나 추워서 죽습니다. 정밀한 시계보다도 더 세밀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저 거대한 우주가 그냥 생겨났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알다시피 비록 연수가 길기는 하지만 태양도 언젠가는 그 생명을 잃게 되고 사라지는 별임을 과학 스스로가 말합니다. 모든 행성과 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끝이 있음은 또한 시작이 있었음 말하는 것이지요. 시작도 없이 어떻게 끝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이여, 우리가 믿고 아는 바와 같이 이 우주와 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그분이 알파와 오메가, 곧 시작이요, 끝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주만물의 질서의 근원이시고, 우리의 선과 악의 분별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양심과 직관 등의 기능을 본성상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은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며, 죽음 이후에 심판, 곧 상급과 형벌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식적으로, 또한 직관적으로 살펴보아도 육신의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영의 생명이 있으며, 심판이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무리를 나누듯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운명은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무섭고도 두려운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진정 진리의 길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비록 좁고 험하더라도 갈 수 있습니다.


이 글의 마지막에는 이러한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행하야 하는지 이르시고 감동하신 주님의 말씀을 적으며, 지옥은 있습니다 2편의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머리의 생각, 곧 이성에 속한 상식과 논리를 좇아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가슴의 직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의 가슴 속, 곧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내적증거와 음성을 좇아서 살아가야 합니다.


입술로만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겠지라는 라는 가벼운 생각을 버리고, 사도바울의 권면처럼 하나님 안에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리되, 한편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서 애쓰며 나아가야 합니다.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라. 그것이 이 땅에서와 하늘에서도 생명과 복을 누리게 되는 길이다. 날마다 시각마다 너희의 생각과 뜻을 좇아 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 언제나 내 안에 있으라” 주님은 이 글을 기록하기 위해 도움을 간구하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우리 스스로 지금 내가 주님 안에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 아니면 밖에 있습니까? 스스로 알 수 있지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죽음과 심판이 정한 이치요, 다가올 미래임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야 하지만, 한편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로 말미암은 죄악으로부터의 떠난 거룩한 삶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온전히 성취하려는 애씀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안에, 곧 말씀 안에, 주님과 생명의 연합됨 속에 거하여, 주님의 말씀처럼 이 땅에서도 생명과 복을 누리고 하늘나라에서도 별처럼 빛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과 축복하심을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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