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등불/초록 영성수필

로뎀나무 (1) - (심신의 지침과 영적 탈진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초록 등불 2011. 5. 30. 10:19

 

※ 로뎀나무 (1) ※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을 넘어서는 어려움이나 일을 감당하고 나면 다소 기력을 탈진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열왕기상 19장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지요.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영적 능력의 거장 엘리야는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말씀을 선포하고는 그 말대로 이루어진 긴긴 가뭄 때문에 수년 동안 아합과 이세벨의 잡아 죽이려는 집요한 추적을 피해서 그릿 시냇가로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연연하며 숨어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잘 아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영적 능력 대결을 하게 되지요. 그리고 엘리야는 너무나도 극적인 짜릿한 승리를 맛봅니다. 얼마나 승리의 기쁨이 컸던지, 그리고 기름부으심이 강했던지 아합왕의 마차 앞에서 마차보다 빨리 달리기도 하지요.


그의 기쁨은 두 가지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제 참신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아합이 보았으니 더 이상 죽이려는 집요한 추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의 기쁨, 그리고 하늘에서 직접 불이 떨어져 바쳐진 송아지의 제물은 물론, 도랑의 물을 완전히 마르게 할 뿐이 아니라 흙과 돌마져 태워버린 하늘에서 응답하신 하나님의 불로 인한 영적인 승리의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비유컨대 그 기쁨과 환희의 크기는 가령 우리가 누군가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더니 다시 살아났을 때와 같은 크기이겠지요. 하늘에서 직접 불이 떨어지는 일은 결코 일상에서 경험되지 않는 큰 기적의 일이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극적인 기쁨과 승리의 순간도 잠시, 이세벨의 다시금 죽이려는 집요한 추적의 소식에 엘리야는 그만 낙담하고 탈진하고 맙니다.


사람의 심리상 그럴 수 있지요. 가령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가 수년 동안 고생하며 기도하였더니 어느 해 교회가 많이 성장했다고 합시다. 능력과 기적도 나타난다고 합시다. 그동안 고생도 잊혀질 것이고 가슴에는 기쁨과 환희가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아내나 자녀가 세상을 갑자기 떠나거나 하면, 사람은 심리적으로 낙담과 탈진 상태에 빠질 수 있겠지요.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 목회의 길을 열어주시나보다 기뻐하고 있는데, 그런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면 사람은 심리상 낙담과 탈진 상태에 빠질 수 있겠지요. 엘리야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약5:17)라는 말씀처럼, 구약의 대표적인 영적 능력의 선지자였던 엘리야도,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그렇게 능했던 것이지, 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시 이세벨의 죽음을 부르는 집요한 추적을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하나님 안이 아닌 자신 안에서 순간 낙담하고 탈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또 다시 도망을 갑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갑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서 낙담과 탈진한 마음으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하소연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살아가다보면 어느 날 이런 낙담과 탈진의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저도 조금 쉬고 싶다라고 말씀을 드렸었지요. 저의 경우는 무슨 영적인 탈진이나 그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일 여년 넘게 투병생활을 해 오면서, 텔레비전을 본 적도 없고,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나들이를 한 적도 없고, 대부분의 생활의 저의 작은 방에서 홀로 주님 앞에서 기도와 말씀, 그리고 말씀을 전하거나 혹은 신앙서적들을 탐독하거나 혹은 건강관리를 위한 운동의 시간들뿐이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영적으로 참 유익한 시간임은 분명하지만, 말씀뿐만 아니라 떡도 필요한 사람에게 인간적인 삶의 즐거움, 가령 가끔의 기분전환을 위한 나들이나 무슨 일, 또는 성도의 교제 곧 친교 등이 하나도 없는, 광야의 삶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도다” 과거형의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치유를 주장하고 고백하지만, 아직 그 믿음이 실제가 되지 않은 시간, 눈만 뜨면 때로는 잠잘 때도 무의식 중 느껴지는 몸의 통증과 피곤함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저의 삶의 한 수고로움이지요. 여러분은 제가 어떠한 고통과 피로감을 느끼며 하루하루 주 안에서 감내하며 때로 이겨가고 있는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냥 잠시 쉬고 싶더군요. 로뎀나무 아래서 그냥 먹고 잠을 자기만 한 엘리야처럼 기도와 말씀도 잠시 내려놓고, 그냥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오락시간도 갖고, 며칠 나들이도 해보지 못한 좋아하는 봄날이 그냥 흘러감이 너무 아쉬워 봄날 속으로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그 품에 안겨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좀 쉬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살아가보면 엘리야처럼 낙심하거나 영적인 탈진상태를 겪을 수 있습니다. 다소 심적 피로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거장인 사람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영적 거장의 대표적인 엘리야,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하늘의 불수레와 불말들의 현현 가운데 회리바람으로 승천한 엘리야도 낙담하고 탈진하였는데, 우리는 오죽 그러하겠습니까?


영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기도와 말씀의 생활이 표준이요, 중심이지만, 때로는 항상 그것이 정답이 아닌 때도 있습니다. 가끔은 약간의 휴식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도무지 기도하려고 해도 되지 않고 말씀을 잃으려고 해도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소의 쉼입니다.


대부분 기도와 말씀와 찬양 등의 경건한 시간을 통하여 새롭게 충만함을 덧입지만, 어떤 경우는 무조건 열렬한 기도와 말씀을 읽는 것이 영적인 충전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너무 피로해도 우리는 지치게 됩니다. 영적인 사역을 너무 무리하게 감당하여도 지치게 됩니다. 이럴 때는 주 안에서의 쉼이 한편 충전의 방법이 됩니다.


회사나 군대에서 가끔 휴가를 주는 이유도 이와 같은 원리에서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때로 쉼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이지요.


저의 경우 가끔 몸이 곤하고 맘이 곤할 날 그래도 앉아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려 하면, 주님께서 “그것보다 오늘은 누워서 조용히 찬송이나 찬양을 불러보거나 혹은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기 원하시는 것”을 성령의 내적증거로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그냥 좀 쉬어라”라고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가끔은 우리가 지치고 힘들 때는 한편 주 안에서 쉼의 시간을 갖는 것이 영적 충전의 한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지내온 1년의 시간이 영적으로 더욱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지만, 한편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힘든 시간이기도 하였기에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처럼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들도 해보며 조금 쉬었고 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토요일은 주일 예배를 준비해야 하기에, 주일 나눌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그냥 저의 다소 육적, 심적으로 조금은 지쳐서 쉼을 갖는 시간, 이 상황에 어우리는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의 말씀을 논해보고 싶어서 이 말씀을 두고 이런저런 것들에 대하여 기도하며 물었습니다.


전할 말씀의 이런저런 것들에 대하여 기도할 때마다 주님이 늘 곧잘 응답하시거나 감동으로 알게 하시거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매달림이 필요합니다. 그 때마다 제가 주님께 드리는 고백이 있습니다.


1년 투병생활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 혼자 늘 방에 있게 되니, 신앙서적들을 이것저것 사서 보면서 지내왔지만, 지난 10여년의 세월은 전 성경이외의 책은 거의 사서 읽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가끔 신앙서적을 사서 읽어보았지만, 결국 그윽하고 깊은 샘은 성경이라고 느꼈고, 그러한 책들은 읽으면 잠시 사이다처럼 짜릿하지만 결국은 읽을 때마다 영혼에 생수를 공급해 주는 성경처럼 깊이 있는 샘은 아니라고 느낀 부분도 있었고, 또 한편 모든 신앙의 근거요, 표준인 성경 이외에 무슨 책이 필요할까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늘 피곤하다보니 책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년 투병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책들을 다소 접해보니, 별로 깊이가 그다지 없는 책들도 있지만, 가끔은 참 많은 깨달음과 새로운 영적인 시각을 열어주는 책들도 있더군요. 참으로 유익하다 싶은 책들은 대부분 이전 세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아 성령 안에서 쓰임 받은 분들의 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원리는 간단하고 같아 결국 이분 저분의 책 몇 권을 읽어보니 핵심은 그냥 A4용지 한 장이면 정리도 가능하겠더군요. 나아가 결국은 이론보다는 얼마나 그분들이 했던 삶을 우리도 실천하느냐가 결국은 열쇠이더군요. 영적 원리는 단순하고 같아 몇 권의 책만 읽어보면 대부분 가늠이 됩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원리만 듣는 것보다 경험을 통한 그리고 세세한 표현들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주기에 분명 성경 이외에 신앙서적을 탐독하는 것도 신앙생활에 활력과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금 원론으로 돌아가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난 10여 년간 수많은 말씀과 글들을 저는 적었습니다. 가끔 다른 분들의 설교나 책들에서 힌트를 얻어서 나름 저의 것으로 소화시켜서 적은 것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거의 모든 말씀과 글들은 그냥 기도하면서 성령 안에서 깨닫게 된 것들이나 조명하심 가운데 알게 된 것들이나 감동으로 이르시는 것들을 적은 것들입니다.


목회를 하시는 분들은 경험하시겠지만, 때로는 설교자료의 부재에 시달리곤 하지요. 어떤 유명한 목사님의 글에도 금번 주일 설교가 끝나면 다음 주일 설교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된다고 적고 있더군요. 이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설교의 시간, 늘 신선하고 좋은 설교를 하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도 한 때 교회에서 그런 걱정이 전해오더군요. “매일 성도님들은 저의 말씀을 기다리실 텐데 매일 혹은 하루걸러 어떻게 계속 전할 말씀을 기록할까?”


그러한 문제로 주님께 기도하였더니, 아니 기도하였다가 주님께 조금 야단을 맞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인데, 가지는 포도나무로부터 늘 싱싱한 생명의 영양분을 공급받는데, 포도나무인 내가 해야 할 일을 가지고 가지인 네가 왜 걱정하고 염려하느냐? 걱정과 염려도 내 앞에서 죄에 속하는 것인 줄 모르느냐?”이르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은 아무런 자료하나 읽지도 의지하지도 않아도 늘 말씀과 글을 기록하게 하셨고, 지금도 체력이 딸려서 그렇지 전하고 싶고 읽게 하고 싶은 글과 말씀들의 영감은 쌓여 있습니다.


어쨌거나 어떤 설교의 시간을 앞에 두고 전할 말씀이나 그 말씀에 대한 가르치심을 간구할 때 주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면, 오래전 주님이 하신 말씀으로 그분 앞에서 매달립니다. “주님, 주님은 포도나무요, 저는 가지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전할 말씀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약속대로 지금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십시오”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기다리면 대부분 주님께서 전할 말씀을 영감으로 주시며 또한 큰 윤곽과 대지를 주십니다.


이번 토요일도 그랬습니다. 몸과 마음이 곤하여 조금은 쉼을 갖는 시간, 로뎀나무 아래서 잠을 자면서 쉬어야 했던 엘리야의 성경말씀과 관련하여 전할 말씀의 대지를 간구하였습니다. 수이 응답하시지 않기에 앞에서 언급한 포도나무의 약속의 말씀을 말씀드리며 간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몇 가지 전하고 기록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전할 말씀과 아울러 그러한 심신이 지치고 영적 탈진에 관한 말씀도 하셨는데, 말씀보다 먼저 그러한 영적, 심신의 탈진에 관하여 먼저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 말씀부터 나누고 싶습니다.


심신의 지침이거나 영적인 탈진 등에 관하여 주님은 세 대지로 감동하시며 알게 하셨습니다.


첫째는 그러한 심신의 지침이나 탈진이 오지 않도록 자기 관리를 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에는 매일의 성실한 기도생활과 말씀생활, 말씀 안에서 성령과 주님과 동행하는 것들이 있겠지요. 또 나아가 육체적으로나 심적 혹은 영적으로 지치고 탈진 상태에 빠질만큼의 무리하게 일을 하지 않는 지혜도 필요하겠지요. 또한 적절한 휴식과 가끔의 인간적인 취미생활 같은 부분도 조화롭게 병행되어야 하겠지요.


저 같은 경우는 다른 요인이 아닌 제 의지로 어찌되지 않는 건강의 문제입니다만, 때때로 우리는 몸 관리를 잘하지 못함으로써 건강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요. 건강의 연약함도 우리의 지침과 탈진의 한 요인이므로 음식과 운동 등 건강관리에도 유의하여야 하겠지요.


구약시대의 모세도 자신이 그 수많은 백성들의 모든 일들을 감당하려하다가 탈진상태에 빠질 것 같을 때, 장인의 권고로 천부장, 백부장 등을 세워서 감당해야 할 분량의 일의 몫을 적정한 수준으로 조정을 하지요.


기도와 말씀 등의 경건한 생활에 성실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오는 것은 어쩌면 탈진이 아닌 영적 어두움으로 빠지는 것이니, 이러한 경우는 어쩌면 각성하여야 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때로 너무 무리하게 일을 하거나 감당하려다가 지침과 탈진에 우리는 빠질 수 있습니다. 체력과 또 자신이 충전하는 시간 등을 고려하여 사역과 소명을 조화롭게 감당할 필요가 있다는 가르치심이었습니다.


둘째는, 그러한 심신의 지침이나 영적인 탈진이 왔을 때, 세상 밖에서 그러한 것들을 해소하려고 하지 말고 주 안에서 쉬라고 감동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대단한 영적인 능력을 행하거나 성령이 충만해 보이는 분들은 가끔이라도 허무와 공허감이 찾아오거나 영적인 곤고를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휼륭한 믿음의 선조들의 책들을 읽어보면 그러한 분들도 때때로 그러한 시간에 빠지곤 합니다.


이러한 때가 그런 사역자분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곤고함이 깃들고, 외부로부터 재물이나 정욕적인 유혹이 손을 내밀면 빠지기 쉬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간에 많은 영적이며 능력 있던 사역자들이 유혹에 빠져서 세상적인 길로 걷게 된 경우도 많았지요.


영적인 생활을 지속적으로 영위했는데도 찾아온 어떤 일종의 곤고함이기 때문에 가끔은 일탈의 위험성이 있는 시간입니다. 영적인 선배님들의 글들을 읽어보면 가령 더 높은 영역으로 이끄시기 전 그런 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더군요. 다른 어떤 요인들도 있겠지요.


보통 우리가 느끼는 기분이나 감정은 혼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충만하다고 하여서 늘 혼의 감정도 늘 고무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우리의 감정과 느낌에 의해서 지배당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이다 보니 감정과 기분이 좋고 고무되지 않으면 우리는 힘들어 할 수 있지만, 오직 말씀 위에서 굳게 서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선배님들은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마구 죄악 가운데 살아가다가 주님 앞에서 회개하면 이 때는 영적, 혼적으로 큰 기쁨이 임합니다. 왜냐하면, 어둠이 물러가고 환한 빛이 들어오면서 비유를 들자면 영적인 전위의 차가 크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심령 상태가 크게 변화되기 때문에 우리의 혼도 그것을 느끼고 고무적이 되고 기쁨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늘 영적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늘 그 심령에 빛이 임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은은한 영적인 평강을 누리겠지만, 그런 커다랗고 충격적인 큰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쁨을 매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날은 아무런 감정적 기쁨이나 고무감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 위에서 서야지, 혼적인 감정이나 느낌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흔들려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모든 것들에 대항하고 물리치며, 말씀으로 승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주님이 감동하신 참 느낌표 있는 가르치심은, 이러한 때에 세상을 향하여 나가지 말고, 좋은 영적인 멘토나 친구가 있다면, 그러한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교제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감동하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감동하심과 아울러 생각할 때 그러하기 때문에 성도의 교제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지요.


롬1: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히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히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살전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살전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제가 이 부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성경 말씀을 언급한 것은, 성도의 교제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연약한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아가다가 때때로 낙심하고 지치고 영적 탈진 상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과 말씀으로 피차 서로 안위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혼자 타는 장작불은 곧 꺼져버리고 식어버립니다. 탈진하여 버립니다. 그러나 함께 모인 장작불은 두개가 모이면 4배가 되고, 세 개가 보이면 9배가 되는 제곱의 형태로 그 열기가 더하여 갑니다. 초대교회와 큰 핍박의 시기에도 성도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근본은 성령님의 역사이겠지만 이러한 서로 모이고 하나 되고 피차 안위하고 격려함고 서로 뜨겁게 사랑함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 신앙생활을 하면서 좋은 성도의 교제와 그러한 친구나 멘토를 두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때로 지치고 탈진 상태를 당할 때 일어날 수 있는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성도의 교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가려 사귀고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본성상 위에서 아래로 떨어짐은 쉬어도, 아래서 위로 오르는 것은 노력과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을 하거나 오래 친구로 사귀다보면 십중팔구는 함께 불신앙의 세계로 떨어지기가 쉬운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이와 같이 말씀하고 있지요.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도 세상에 속한 바 어두움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릴 수밖에 없지만, 진지한 관계와 사귐은 구별하여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혜로운 사귐이 때로 만나게 되는 심신의 지침과 어려운 일 앞에서의 믿음의 나락과 영적인 탈진 상태에서 영적인 멘토나 동료를 통하여 주님의 건져 올려주심을 가져오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쉼을 누리며 다시금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하며 마음을 추스르라, 내가 너희를 어루만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아무리 영적인 사람과 거장이라도 때때로 원인이야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영적 곤고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심신이 지칠 때도 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만사 잊고, 차라리 죽고 싶다 하소연 하며, 모든 것을 내놓고 먹고 자면서 마냥 쉬던 엘리야처럼 조금은 쉬어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그러한 때에라도 결국은 주님 앞에로 새롭게 나아가서 새롭게 충만함과 신선한 기름부으심 가운데 다시금 일어나야 합니다. 먹고 자면서 쉬던 엘리야는 어디로 갔습니까.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향하였지요?


그러한 영적인 곤고한 시간을 잘못하여, 세상의 것들과 정욕을 향한 일탈로 나아가면 더욱 곤고함으로 추락할 뿐이며, 잘못하면 영원한 사망과 멸망의 길로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루만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지치고 탈진한 엘리야를 이해하셨습니다. 찾아 죽이려는 왕과 왕비의 집요한 추적 속에서 받은 마음의 힘듬과 큰 승리의 기쁨을 맛본 뒤에 또 다시 찾아오는 환란에 대한 마음의 추락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보내어서 엘리야를 어루만지었습니다. 떡과 물병도 공급하여 주었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또 다시 하나님은 사자로 보내서 어루만지며 먹고 힘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때때로 육신적인 아픔이던, 환경적인 아픔이던, 혹은 무리한 사명감당으로 인한 영적 탈진의 상태이던, 세상으로 향하지 아니하고 차라리 주님이 계신 광야로 나아가서, 로뎀 나무를 향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새롭게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지치고 힘들 때 우리는 잠시 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세상을 향하여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쾌락과 일탈로 빠져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차라리 주님계신 광야로 나가서 주님 앞에서 “죽여 주시옵소서!”라고 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조금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다 임한 지침과 탈진도 결국은 주님으로 새롭게 충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어미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그 가운데 다시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 주님의 빛과 성령의 위로 가운데서 우리는 다시금 울먹이던 눈물을 훔치고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무 길어 다음에 이어서 2편 혹은 2, 3편으로 전하겠습니다. 샬롬!!)

 

<저작권자: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등불 목사>

 

 

[샬롬] 혹 말씀을 가져가신다면 불편하시면 아래링크는 삭제하시더라도 글쓴이는 남겨주셔서 저작권은 지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늘 평안하시고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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